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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에게 조국정신이 필요하다!”[단군문화기획] : 103편 경북독립운동기념관 두 번째 이야기-류인식의 단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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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3.11  15:11:57
글/사진=윤한주 기자  |  kaebin@ikoreanspirit.com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도무지 역사관념이 없어 단기삼국(檀箕三國)이 어떤 역사인지 알지 못하고 조국정신이 나날이 없어지니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단군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역사를 《대동사(大東史)》로 펴낸 독립운동가 류인식(1865~1928)의 말이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2년 저술에 착수해 1917년 초고를 완성했다. 이후 1920년까지 수정하고 보완했다. 그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서도 통사를 쓴 이유는 다름 아닌 ‘젊은이들’을 위해서였다. 이들이 조국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강조한 단재 신채호의 생각과 같다. 

 
   
▲ 독립운동가 류인식과 대동사(사진=윤한주 기자)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류인식은) 한순간도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투쟁한 한국독립운동사의 대표적인 지도자"라며 ”우리 민족이 단군 자손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고유문명을 지닌 민족사가 노예사가들에 의해 완전히 말살당한 것을 통한으로 여기고 젊은이들에게 조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대동사를 저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류인식은 단군을 국조로 보고 배달족을 종족으로 해서 역사를 서술했다. 이러한 인식은 대종교(大倧敎) 사관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대동사》의 〈단군조선기(檀君朝鮮紀)〉는 대종교 2대 교주를 역임한 김교헌의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 의 내용과 같다. 그러나 류인식은 홍암 나철이 1909년에 중광한 대종교에 입교하지 않았다. 철저히 유학자임을 고수했다. 
 
그렇다면 국조에 관해서 근대 유학자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 박미라 한서대 연구교수는 전통도학자와 개혁유림으로 나눴다. 전통도학자는 보수유림을 말한다. 주로 공자와 맹자의 도를 연구하고 선양할 뿐 우리 민족의 국조론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가 있다. 박 교수는 “그는 오직 공맹의 도와 정주(程朱)의 학을 부흥시켜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신념에 차있을 뿐, 그의 문집에는 단군에 대한 언급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개혁유림은 전통적 유교사상의 토대 위에서 서구문화를 수용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했다. 대표적으로 당대에 문명을 떨치다가 을사늑약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망명했던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을 들 수 있다. 그는 《역사집략(歷史輯略)》과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 등의 조선역사를 다룬 사서에 단군을 기술했고 〈갑자문록(甲子文錄)〉에는 《천부경(天符經)》을 소개했다.
 
류인식은 보수에서 개혁으로 바뀐 경우다. 안동 예안에서 태어난 그는 퇴계의 전통을 이은 정재학파 가문에서 자랐다.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수학했고 조선말기 학자이자 의병장인 김도화를 스승으로 모셨다. 1895년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오백 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려는데 삼천리 강역에 한 명의 의사도 없다는 말인가?”하며 비분강개하며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단재 신채호를 만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단재는 그에게 서양의 사상을 담은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건넸다. 이 책을 읽고 류인식은 신학문을 공부한 선비야말로 앞으로 조선을 이끌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안동에서 가장 먼저 계몽운동에 나선 혁신유림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 독립운동가 류인식의 《대동사》가 전시되어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그는 서울에서 단발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부친 류필영은 아들을 앉지도 못하게 하고 쫓아냈다. 부자관계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안동은 물론 전국에서 이들을 비난하는 편지가 쇄도했다. 이에 상심한 류필영은 아들과 의절한다. 류인식의 스승 김도화 또한 사제관계를 끊는다. 류인식은 장차 몸이 없어지려는 판국에 털이 뭐가 그리 소중하냐고 되물었다. 
 
박 교수는 “겨레가 죽음과 멸망의 길로 내몰려 있는데, 상투가 무슨 소용이냐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는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는 스승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했다. 서북지방의 사교(기독교도)들도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나는 형국에 예의의 고장인 영남에서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스승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한 것”이라고 말했다.
 
류인식은 1907년 김동삼, 이상룡과 근대적 중등교육과정의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다. 1908년부터 1918년까지 8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 대부분은 만주로 망명하거나 3․1운동, 신간회 지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의 주역이 됐다. 학교 위치는 현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있는 자리다. 100년 전 독립군을 양성하던 협동학교가 21세기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기념관으로 바뀐 것이다. 
 
김희곤 관장은 "우리 기념관은 조상 자랑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조상들의 뜻과 삶을 제대로 알고, 이를 계승해 나갈 사람을 키워낸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라고 말했다.<계속>
 
 
■ 참고문헌

김동환, 〈단군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 《선도문화》 제11집,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2011년
박걸순, 《류인식 (시대의 선각자 혁신 유림)》, 지식산업사 2009년
박걸순, 〈일제강점기 안동인의 역사저술과 역사인식〉, 《국학연구》 제20집, 한국국학진흥원 2012년 박미라, 〈근대 유교의 단군 국조론〉, 《한국사상과 문화》 28권 , 한국사상문화학회 2005년
조남호, 〈金澤榮의 天符經 주석 연구〉, 《동서철학연구 》 제45호 , 한국동서철학회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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