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항쟁기에 우리나라는 일본과 총칼로만 전쟁하지 않았다. 펜으로도 싸워야 했다. 일제가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정신을 말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가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했던 식민정책과도 관련이 깊다. 

춘천은 어떠했을까? 이곳에 자리한 우두산이 일본신화에 나오는 스사노오노 미코토(素戔嗚尊, 스사노오로 약칭)가 강림한 성지(聖地)로 조명을 받았다. 스사노오는 일본의 개국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동생이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따르면 둘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스사노오는 누나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어머니의 나라에 가고 싶다고 울면서 세월을 보내자 천상에서 쫓겨났다. 이후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은 신라국(新羅國)의 소시모리(曾尸茂梨)였다. 다시 일본 이즈모로 건너가 살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제는 조선을 침탈하고 소시모리 장소를 두고 논의를 거듭했다. 최석영 박사(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학예연구관)의 연구에 따르면 경주설, 가야설, 춘천설이 있었다.

 
▲ 우두산에서 촬영한 소시모리신사 건립지 시찰단. 출처는 《춘천풍토기》이다.(사진=최석영 박사의 연구논문에서 발췌)
 
춘천시와 거창군의 엇갈린 행보
 
가나자와 쇼자부로는 《삼국사기》나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우수주(牛首州)는 일설에 우두주(牛頭州)로 쓰기 때문에 춘천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문제는 우두를 소시모라고 훈독한 예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소시모리(曾尸茂梨) 가운데 시(尸)는 조사로서 그것을 제외한 소모리는 서벌(徐伐/소호리)이라는 것. 이는 신라의 수도이므로 경주설이다.
 
반면 와다 유지는 소시모리를 경상남도 가야산으로 보았다. 《동국여지승람》 에 가야산이 일명 우두산이었고 이즈모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오는 데 편리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춘천설은 일본의 신도 연구자들과 신화학자들이 소시모리를 언어학적으로 풀어서 '소의 머리'로 보았고 우두리(牛頭里)로 연결했다. 조선일일신문(朝鮮日日新聞) 기자 카아노 반세이는 1935년 《춘천풍토기》에서 마을사람들이 우두산을 영지(靈地)로 생각해왔다는 점, 유생(儒生)들이 말하는 바 등을 종합해서 우두(牛頭)를 소머리가 전화(轉化)된 것이라고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었다. 춘천시민은 일제가 우두산에 소시모리가 바다를 건너 돌아온 땅이라고 새긴 비석을 뽑아 없앴다고 한다. 소시모리설에 대해서도 내선일체를 합리화하기 위한 일본의 괴변이자 억지라고 비난했다. 반면 경상남도 거창군은 우두산 일대를 일본왕가의 본향이라는 주제로 테마관광단지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140억원의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이었다. 
 
최 박사는 "(당시) 거창군을 비롯하여 관계자들에게 문의한 결과 위와 같은 계획이 예산이 확보되지 않아 실제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라며 "일제강점기 동안 생산된 동화담론들은 그것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없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서 우리의 현실을 규정한다"라고 지적했다.
 
▲ 일본 시마네현 야에가키 신사에 있는 스사노오이다. 8세기경에 벽화로 그려진 것으로 보고 있다(사진=민속원 출판사)
 
일선동조론자들의 음모
 
주목되는 것은 일본인들이 스사노오를 단군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1799년 코케이가 쓴 《한전필경》에서 “조선국 최초의 임금을 단군이라 한다. 이는 스사노오를 말하는 것이라고 쓰시마에서 하는 말이다”라고 밝혔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쓰시마(對馬島) 사람들이 그렇게 봤다는 것이다. 
 
노성환 울산대 교수는 “어느 문헌에도 쓰시마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없다”라며 “오히려 그가 한국을 왕래했다면 동해안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가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곳이 이즈모이며, 이곳은 오늘날 동해안을 바라보고 있는 시네마현의 이즈모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870년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문헌이 등장한다. 기노 시게츠구가 편 《팔판향진좌대신지기》이다. 
 
“한국 상고대부터 대대로 내려온 전설이다. 아마도 단군은 스사노오를 말하는 것이며 한국 낙랑의 우두산의 단목 아래에 내려옴으로써 그 나라에서는 단군이라 하고 대대로 이 신존을 받드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스사노오의 신라강림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조선의 시조로 확대해석한 것이다. 문제는 일찍부터 스사노오가 한국 일부를 점령했다는 해석이다.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자 이러한 설이 기정사실화됐다.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으로일본이 형이고 조선은 동생이라는 논리다. 일선동조론자들은 조선신궁의 제신으로 단군과 스사노오를 모시는 운동을 벌인다. 그러나 학계와 일제의 반대로 좌절된다.
 
노 교수는 “이론적으로 부족하다는 비판과 함께 한국의 민족주의에 자극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라며 “그 결과 단군은 조선신궁은 물론 모든 신사에서 배제됐고 역사교육에서도 빠지게 됐다”라고 말했다. 
 
한편 스사노오는 일본이 아니라 신라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구메 구니다케 도쿄대 교수는 《일본고대사(1907)》에서 “스사노오는 신라신이다. 스사노오는 하늘나라 고천원(高天原)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려간 곳이 신라 땅 우두산(牛頭山)이며, 그곳에서 배를 만들어 바다 건너 이즈모 땅으로 건너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구메 교수는 이 때문에 일제 당국에 의해 대학 강단에서 추방됐다. 
 
이처럼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피해는 일선동조론자들에 의해 역사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이다. 그 후예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선조를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가 한국 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뉴라이트 역사관에 동조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1922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조선인 청년들이 그들의 선조를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켜 하나의 기풍을 만들라”는 교육이 국민인식으로 남아있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일본 관광객에게 장사하기 전에 역사인식부터 바로잡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계속)
 
참고문헌
 
노성환,《고사기》, 민속원 2009년
노성환, 〈한국의 단군과 일본의 스사노오〉, 《동북아문화연구》 제26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11년
윤해동 천정환 외, 《근대를 다시 읽는다》, 역사비평사 2006년
최석영, 《일제의 조선연구와 식민지적 지식 생산》, 민속원 2012년
홍윤기,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 효형출판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