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성 내 개천예술탑(=윤한주 기자)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이 감응한다고 했다. 제사 준비가 남다르다. 강화도 마니산에서 성화를 채취한다. 서귀포 바닷물을 떠오고 13개 시도의 흙을 모은다. 진주에서 매년 10월이면 개최하는 개천예술제(開天藝術祭)의 서제(序祭)를 위해서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제물을 마련한 설창수 시인(1916-1998)은 “단군을 받들어 나라의 영광을 되찾고 민족적 르네상스를 이룩하자는 것이 예술제의 참뜻”이라며 “서제를 통해 국민이 주인인 민주의식과 역사적 자존의식을 일깨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개천예술제의 역사는 설 시인으로부터 시작됐다. 1916년 창원에서 태어난 그는 1937년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1939년 리쓰메이칸대학 예과를 다니다 중퇴하고, 1942년 니혼대학 법문학부 예술과를 중퇴했다. 일제에 사상범으로 체포돼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1946년 《경남일보》 주필 겸 사장을 맡았다. 1947년 동인지 《등불》에 〈창명(滄溟)〉 등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인이자 언론인이었던 그가 문화예술운동가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49년 개천예술제 때문이다. 
 
“H다방 2층에서 모여 유사 이래 처음인 대한민국 세운 돌맞이 잔치를 의논하게 되었다. 동시에 경술국치 후로 근 40년의 왜정 압정에서 해방된 자유 독립 국민으로서 4,300년 단조조국 이래 일체 왕손끼리가 미증유한 일대 민족 영광과 기쁨을 예술 올림피아로서 전개하여 조국자에 제사함으로써 광복 민족임을 자축하고자 국본의 근원원천인 구력 개천절을 택일했었다. - 개천예술제 40년사”
 
개천예술제가 1948년 정부수립 1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종합예술제였고 지방문화예술행사의 효시라는 것이 김철수 진주예총 회장의 말이다. 그렇다면 왜 진주에서 단군을 모셨던 것일까?
 
▲ 개천예술제 창설자 설창수 시인(=한국예총 진주지회)
 
강희근 경상대 명예교수는 “한때 단군 제단의 제의성에 직접성이 없고 왜 하필 진주인가라는 일반인들의 반론 앞에서 20여년 표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설창수의 제단 복귀로 원상회복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이후 개천예술제 서제는 한동안 지내지 못했다. 1984년에서야 부활했다. 설 시인은 1960년 4·19혁명 직후 총선에서 6년 임기의 참의원에 당선됐지만 5·16으로 정계를 떠났다. 그는 군사정권에 타협하지 않고 독재타도에 앞장섰다. 이러한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는 “(설창수 시인은) 먼저 국조를 모시고자 하는 염원을 갖는 바로 그 자리가 제단이 된다”라며 “밀양이나 청주에 제단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진주가 나라를 다시 열고 정부를 세운 의미를 먼저 깨닫고 국민의 예술품을 개천 제단에 올리는 행사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애국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설 시인은 개천송가도 지었다. 

짙은 밤안개 물리쳐 내시고
누리 동쪽에 새 하늘 열으시다
동바다 처녀 볼에 보라빛 비낄 제푸른 골골마다 노래소리 깃들고
영광 길이 우리속에 살아남으리
어허야 시월 상달 초사흘날
 
잠든 밤 고요 일깨워 주시고
누리 동쪽에 새나라 세우시다
장배간 봉우리에 향촛불 밝힐 제
푸른 골골마다 노래소리 깃들고
영광 길이 우리 속에 살아 남으리
한 아배 아들딸인 배달겨레
 
▲ 개천예술제 서제와 타종 그리고 행사(=한국예총 진주지회)
 
단군이 새 나라를 세운 영광이 후손 대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더구나 특정 정치나 종교단체가 아니라 문화예술로서 개천절을 기리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행사에는 앞편에 소개한 남강유등축제를 비롯해서 각종 문예행사와 전시, 민속경연이 다채롭게 진행된다. 
 
현재 개천예술제 성화는 설 시인의 작고 이후 마니산에서 진주성으로 바뀌었다. 강 교수는 “성화는 위원장이 마니산 참성대에서 채화하고 그 불을 봉송해서 대회 기간 단군 할아버지의 개국 정신으로 타오르도록 하는 의식”이라며 “(진주성 채화로 바뀐 것은) 비행기 편이 아니더라도 불씨를 옮기는 과정이 어렵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서제에서 진행하는 호국타종은 헌관과 시민들과의 교감에 있다. 33번 치는 것은 민족대표 33인과 연결이 되며 민족 수호의 의지를 결집하는 효과가 있다. 설 시인은 제의가 국가적인 단위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개천절 정부공식행사에서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 상황이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한편 개천예술제는 지난 2004년에 제2의 창제를 선언했다. 읽어보니 진주시민의 애향심은 국조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됨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한 핏줄 하나의 말씨 하나로 사는 터전을 지켜 내느라 온 진주성민이 목숨을 던져 불꽃을 이룬 임진·계사년 저 장엄한 역사의 힘으로 여기 사도 진주에 시월과 겨레와 신명의 제단을 열고 단군성조에게 예술 문화의 꽃과 향기를 바쳐 올리기 비롯했다.”
 
이처럼 한민족의 역사는 진주시민들의 정신 속에 올바르게 계승되고 있었다. <진주 단군문화 끝>
 
진주 단군문화 기획 취재를 하는 데 도움을 주신 관계자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