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 위대한 일을 해도 그것이 후대에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잊히게 된다. 민족정신의 구심으로 전국에 단군전을 세운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후손조차 만나기가 어렵다.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평균 나이 80〜90으로 고령이다. 이들마저 없다면 단군전을 누가 지킬 것인가? 지난 10일 서울에서 전라북도 순창군으로 내려가면서 든 생각이다. 지금은 성전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알리는 것부터 하고 있다. 후대에 또 다른 누군가가 이 국혼의 바턴을 이어받을 날이 오지 않을까?

이제 순창 단성전을 만나자. 성전의 역사는 조선 정조 2년(17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순화리에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가 되자 일본수비대들이 본부로 사용했다. 해방 후에는 헌병들의 주둔으로 파괴됐다고 전해진다. 현 단성전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중간에 신학우(申學雨) 선생이 있다.

▲ 전라북도 순창군 단성전 전경이다. 신학우 선생과 유림이 세운 성전은 없다.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사진=윤한주 기자)

전국 방방곡곡에 단군묘를 세우자!

신 선생의 멘토는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이다. 면암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서 싸웠다. 그 장소가 순창이다. 지금은 의병운동의 터인 순창객사(淳昌客舍)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48호로 당시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신 선생은 어릴 적에 면암의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조국을 찾을 것인가 하는 우국(憂國)의 심정이었다고 한다.

일제로부터 해방됐다. 그러나 조국은 이념의 갈등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외국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 의존하면서 갈피를 못 잡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국조 단군을 떠올렸다. 홍익인간 이념 아래 민족의 주체성을 길러야 한다고. 그래야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것은 1959년이었다. 그 시작은 단군성전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고향에만 단군전을 짓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아일보는 1962년 7월 8일자에 “이곳 유림 대표들은 전국 방방곡곡에 우리의 조상인 단군을 모시는 묘를 세우는 국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했다”라며 “전국 각 유림 측에 통문을 돌리는 한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에게도 건백서를 내었다”라고 보도했다.

당시 건백서는 "민족의 조상을 잘 모르는 데서 사대사상이 싹트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앞으로 국민운동을 일으켜서라도 단군성조를 봉안하는 묘가 전국 각 고을에 세워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건의했다.

단군위패만 모셨던 이유?

신 선생은 1961년 유림들과 단군성전건립추진준비위원회를 결성한다. 군민의 성금을 모아 3월 20일 단군의 신위를 봉안한다. 한식 목조 와가의 건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단군전과 달리 단군영정을 봉안하지 않았다. 단군성조(檀君聖祖)라는 네 글자의 위패를 모신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전국 단군전에 봉안한 단군상이 통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1992)

당시 운영은 향교 유림이 맡았다. 1965년에 단군기원통일원이라는 단체를 등록했다. 제사는 어천절(음력 3월 15일)과 개천절(음력 10월 3)에 지냈다. 제복, 절차, 홀기 등은 모두 유교식으로 진행됐다. 제사를 지내면 기관장을 헌관으로 선임했다. 올해 개천절에는 황숙주 순창군수가 지냈으니 지자체 수장이 제례에 참석한 전통은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단성전의 역사는 신 선생의 후대로 이어진다. 성전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도로 왔다. 이어 새로 지은 것이다.

단성전의 옛 자료는 없다. 하지만 성금으로 도덕교육관을 짓고 단군상을 모시는 등 성전을 발전시키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역사가 있었다.
 

<계속>

글. 사진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