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곡성 단군성전에 건립한 곡성3.1운동기념탑이다. 입구에는‘뿌리없는 나무는 없고 조상없는 자손은 없다’라고 국조단군곡성숭모회에서 제작한 현수막을 걸었다. (사진=윤한주 기자)

지난 13일 곡성군 단군성전을 찾았다. 서울에서 곡성까지 기차로 2-3시간이면 된다. 이어 성전까지 1.6km다. 택시를 타거나 걷는 것이 낫다.

이강오 전북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곡성 단군전은 충남 작산 단군전, 서산 와우리 단군전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현장에서 받은 안내 책자는 최초의 단군전 사진이 눈에 띄었다. 1914년 두루마기를 입은 신태윤 선생(申泰允, 1884~1961)이 단군전 앞에서 촬영한 것이다. 초가나 다름없는 곳에서 개천절과 어천절을 지내셨다니. 선생의 애국심 앞에 고개를 숙인다.

그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申崇謙, ?~927)의 31대손이다. 호는 백당白堂이다. 단군성전 창설자이지만, 3.1운동을 펼치는 등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김학근 국조단군곡성숭모회 대표이사(곡성문화원장, 79)의 안내를 받고 성전으로 들어갔다.

입구 위로 현수막이 걸렸다.‘뿌리 없는 나무는 없고 조상 없는 자손은 없다’라고 적혀 있었다. 김 원장은 모든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뿌리도 모르고 조상도 모르는 자손들이 많다. 나라보다 종교가 먼저라고 하고 개천절보다 외국의 성인 탄신일을 찬양하는 요즘에 걸맞는 메시지다.

독립운동의 ‘고난’

▲ 독립운동가 신태윤 선생의 동상이다. 대한민국 지도를 조경해 눈길을 끈다(사진=윤한주 기자)

‘3.1공원’이라고 새긴 돌 옆으로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었다. 이어 독립운동가 백당 신태윤 선생의 동상이다. 동상 앞에는 우리나라 지도를 조경해서 눈길을 끈다.

선생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고서면(古西面) 주산리(舟山里)에서 의관(議官) 신석용(申錫龍)의 2남으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1906년에 졸업하고 한성사범학교를 1908년에 졸업한다. 당시 한성사범학교에는 주시경, 어윤적 등의 애국지사가 있었다. 이들의 국어운동과 애국운동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종교(大倧敎) 중광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친 홍암 나철과의 교류다. 이후 백당이 단군전을 건립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은 “독립운동가 이현익 선생이 1962년에 지은 ‘대종교인과 독립운동연원’을 보면 ‘백당 신태윤 선생은 홍암 대종사의 유훈을 받고 국내 비밀사원으로 활동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라며 “대종교 내 비밀결사원은 정인보 선생 등 30여 명이 독립운동을 위해 활약했다”라고 말했다.
 

▲ 독립운동가 백당 신태윤 선생이 1914년 현재의 곡성초등학교 인근에 초가로 단군성전을 세웠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백당 선생이다.(사진=국조단군곡성숭모회)

백당은 이어 1909년 곡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학교에 재직하면서 민족운동의 산실로서 ‘단군전 건립’을 결심했다. 1914년 학교 인근인 삼인동에 초가로 단군전을 건립한다. 겉으로는 선조의 사당을 짓는다고 하고 몰래 단군의 위패인 '단조홍성제(檀祖弘聖帝)'를 모셨다. 이는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며 곡성의 동지를 결집하기 위해서다.

백당의 단군조선에 관한 인식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만주에 있었다. 고구려가 계승했다고 봤다. 그는 1916년 단군의 사적을 고증하고자 만주일대를 답사했다. 독립운동가들과도 접촉한다. 훗날 이들 중 일부가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함으로써 백당은 직간접적으로 상해임시정부와 내통했다.

백당은 그 전부터 구축한 동지들과 함께 곡성장날인 1919년 3월 24일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어 일본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어 경성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자 대구형무소에 이감됐다. 2년을 선고받았지만 미결기간까지 합하면 3년여를 수감했다. 가산은 전부 몰수되고 10년간 자격이 박탈됐다.

▲ 백당 신태윤 선생의 옥중 저서인 '정사'와 '삼일신고'(사진=윤한주 기자)

이때부터 백당의 어린 자녀들은(3남 2녀) 고난의 행군이었다.

"끼니를 때울 수 없어 걸식도 많이 했고 철도공사장에서 노동일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뜻있는 분들이 몰래 도와주어서 겨우 살아갈 수 있었지요. 선친이 술밥 뭉치를 얻어와 호구하던 배고픈 설움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대일항쟁기 우리 가족들은 말 못할 고생을 다한 것이지요. 저희 둘째 형은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촌수도 따지기 어려운 일가에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 백당의 셋째아들 신각균 전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백당은 옥중에서 단군의 건국이념과 민족정기를 밝힌 ‘대한민국 정사’라는 국사책을 저술했다. 또 한민족의 경전인 삼일신고를 풀이한 ‘도해삼일신고해의’를 썼다. 두 책은 백당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조준희 소장은 “1938년에 출간한 삼일신고 부록을 보면 천부경이 실려 있다”라며 “대종교에서도 교단 차원은 아니지만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李始榮, 1869~1953)과 더불어 천부경을 개인 차원에서 신앙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단군의 자손’임을 일깨워!

▲ 독립운동가 백당 신태윤 선생(사진=윤한주 기자)
그는 출감 후 교육사업에 뛰어든다. 경북성주군 초산면 고산동과 전남장성북이면에 학교를 설립한다. 오직 후진을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앞날을 대비한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단군단(壇)을 곳곳에 세운다.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밤에만 개천절과 어천절을 지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단군의 자손임을 일깨웠다.

광복 후에는 곡성군 건국준비위원장으로 추대됐다. 단군전 보본계 모임(국조단군곡성숭모회 전신)을 조직한다. 개천절과 어천절에 전 군민이 참여하도록 했다. 각 시도를 순회하며 국사를 알렸다. 김학근 대표는 중학교 때 백당 선생의 특별강연을 들었다고 했다.

“애국심이 강하셨어요. 우리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항상 주장하셨습니다. 우리가 단군을 모심으로써 주체성을 가진다고. 그 정신을 제가 받은 것 같아요.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실 때는 활기가 넘치셨어요.”

1952년 보본계 회원의 성금으로 현재의 단군전을 건립한다. 삼인동 단군영정도 이곳으로 옮겨온다. 백당은 옥중저서인 ‘정사’를 간행하고 뒤이어 ‘고려사절요’를 편찬 발간했다. 조선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깨우쳤다. 1961년 8월 27일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77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追敍)됐다.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계속)

■ 곡성 단군성전 찾아가는 방법

주소 :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영운1길 33  (바로가기 클릭) 

■ 참고문헌

곡성중앙초등학교 백년사, 곡성중앙초등학교총동창회, 곡성하늘광고기획, 2011년
권경안, 한국의 곡성, 향지사, 1998년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대흥기획,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