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서산 와우리단군전 전경(사진=윤한주 기자)

지난 3일 서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관광지도를 펼쳤다. 그곳에 단군전 2곳이 있었다. 와우리단군전과 옥녀봉단군전이 그것이다.

서산은 충남 서북부 태안반도에 있다. 이곳 사람들은 서산을 ‘스으산’이라고 느릿하게 발음한다. 서산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제호가 ‘스산의 숨결’인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구수한 사투리가 인심 좋은 충청도민을 대표하는 듯했다.

▲ 충남 서산 와우리단군전 홍살문(사진=윤한주 기자)

대표적인 ‘가야산’에는 국보 84호인 마애삼존불과 고려시대 화엄 10찰 중 하나였던 보원사터 등 백제 불교문화재가 많다. 이번에 찾을 것은 백제나 불교가 아니다. 단군조선의 맥(脈)을 잇고 있는 ‘근ㆍ현대의 홍익 유산’이다.

먼저 와우리단군전으로 가보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온산방면으로 가는 버스(471번)를 타고 종점에 도착하면 된다. 하지만 이 버스는 하루에 2번(8시 10분과 15시)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만일 버스 시간을 놓쳤다면 와우2리로 가는(9시 15분, 11시 30분, 13시 40분) 버스가 있다. 대신 종점에서 와우 1리까지 많이 걸어야 하는 수고가 든다.

서산의 십승지, ‘와우리’

 

▲ 최병기 단군전봉안회 총무(왼쪽)가 와우리단군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와우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두 마리 소가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한 마리는 누워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서 있다. 원래는 와우현(臥牛峴) 또는 우현(牛峴)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소에게 먹이를 담아주는 구시(구유)모양의 구시울이 있고 소꼴로 가장 좋은 띠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띠말이 갖춰져 있다. <서산시지>에 따르면 “서산에서 십승지라고 말한다면 와우리를 첫 번째로 꼽을 만하다”라고 밝혔다.

마을에 도착하자 이내윤 단군전봉안회장(68)과 최병기 총무(70)가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이들과 와우1리 단군전으로 이동했다. 서산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할 때 굵은 비가 쏟아지더니, 단군전에 도착할 즈음 거짓말처럼 개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린 단군전이 신비롭게 보였다.

 

▲ 와우리 단군전봉안회 사무실로 쓰고 있는 서재西齋(사진=윤한주 기자)

첫인상은 축구장 크기가 될 만큼 넓은 공간이다. 부여 천진전(클릭)에 비한다면 5배는 될 것 같았다. 보통 입구를 나타내는 홍살문에서 계단을 걸어 오르면 단군전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홍살문에서도 20m 이상 걸어가야 한다. 좌우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재는 행사할 때 손님을 맞는 공간이다. 서재는 봉안회 사무실이고 제례복 등을 갖췄다. 두 곳은 정면 5칸과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올렸다.

봉안회는 1년에 2번 음력으로 단군 행사를 치른다. 어천절(3월 15일)과 개천절(10월 3일)이다. 제의는 유교식 절차를 따른다.

“주민들은 그날을 전체 휴일로 잡아요. 남자도 모두 나오고 부녀회에서도 모두 나옵니다. 200~300명의 손님이 옵니다. 때에 따라서 국회의원도 오고 시장님 이하 많은 인사들이 와요. 전도 부치고 소머리도 잡고 돼지고기도 넉넉히 드리니 주변에서는 소문이 다 났어요.(웃음)”

단군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이 회장의 말을 들으니 이것이 바로 ‘마을축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충남 서산 와우리단군전 입구인 숭앙문 현판(사진=윤한주 기자)

‘단군영정’을 금고에 보관한 이유는?

이제 단군영정을 만날 차례다. 계단을 오르니 숭앙문(崇仰門)이다. 이어 ‘단군전(檀君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본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로는 아담한 담장이 둘러져 있다.

국조 앞에서 이 회장이 향을 피우고 참배했다. 그런데 한쪽에 ‘금고’가 눈에 띄었다. 단군 영정을 보관하기 위해 마련했다고 한다. 행사를 제외하고는 영정은 모사본으로 봉안한다. 금고에서 꺼낸 영정은 부여군 천진전과 다르지 않았다.

 

▲ 충남 서산 와우리단군전 내 봉안된 단군영정(사진=윤한주 기자)

그렇다면 영정은 언제부터 봉안된 것일까?

이강오 전북대학교 교수가 펴낸 <한국신흥종교총람>에 따르면 1913년 충청남도 서산 출신 이민걸(李敏杰)이 처음으로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구한말에 중추원 주사직을 지냈던 인물이다. 서울에 구직하러 갔다가 나철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자택에 단군영정을 봉안하고 이민갑 등 수명의 교인을 얻었다.

나철은 1910년 9월 20일 유교식 신위를 없앤다. 이어 단군영정으로 교체한다. 이듬해는 일반교인에게 봉안하기 위해 단군 영정을 사진으로 인출해 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와우리단군영정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영정을 마치 보물처럼 금고에 보관하고 있는 와우리 주민들의 마음은 애국심이다.

 

▲ 충남 서산 와우리단군전에 봉안된 단군영정(사진=윤한주 기자)

성전을 갖추기까지

서재는 역대 봉안회장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첫 번째 사진 아래는 <유사有司, 박용규朴容圭 밀양인密陽人>이라고 적혀 있다. 1대라고 하지 않고 유사라고 한 것은 봉안회가 조직을 갖추기 이전의 단계라서 그렇다.

일반적으로 유사란 향교나 서원 등에서 구성된 자생적 모임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이다. 3명의 유사를 거쳐서 4번째부터 1대 회장이라는 직책이 생긴다. 이내윤 회장은 10대에 해당한다. 임기는 3년으로 하고 있다.

▲ 최병기 와우리 단군전봉안회 총무와 이내윤 회장(사진=윤한주 기자)

초창기 일제의 대종교인에 대한 탄압은 심했다. (이민걸은) 자기 집에 모셨던 단군영정을 동군 봉산면 금산에 사는 동족 이민갑의 집으로 옮겼다. 감시가 심해지자 1913년 이민갑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인 현재의 소재지 모촌(와우리)에 산막山幕 같은 주택을 짓고 정인채(현재는 덕산읍에 거주)를 입주시켜 밖으로는 민가로 가장하고 비밀히 벽장 속에 단군영정을 봉안했다.

 

▲ 충남 서산 와우리단군전 전경(사진=윤한주 기자)

해방이 되자, 단군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작산단군전을 세운 김동규가 이곳의 단군영정을 작산으로 옮기자고 제안을 내놓은 것. 이에 지방주민들이 단군영정보존회를 결성하고 성금을 모았다고 한다. 1948년 옛 제단을 없애고 단군전이 중건했다. 현재의 모습은 시의 지원을 받고 마을 주민의 힘으로  중축한 것이다.

22편 옥녀봉단군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