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마을은 강석기, 강철구, 강일, 강성모, 강일구, 강병국 등 여섯 명의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진주 강씨들이다. 한 마을에서 여섯 명의 애국지사가 배출된 곳은 전국에서 장정마을이 유일하다. 그만큼 자랑스러운 마을이다. - <부여의 마을이야기>

지난달 29일 장정마을(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을 찾았다. 이곳의 입구는 애국지사 추모비가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에는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9호)을 모방해 만든 고려시대의 부여 장하리 3층 석탑(보물184호)이 있다. 그러나 국보나 보물이 나라를 구하지는 않는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조국을 구한 6인의 독립운동가 앞에 고개를 숙이고 참배하는 이유다.

▲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것을 기념해서 촬영한 대종교인들의 사진이다. 첫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3대 총전교를 역임한 단애 윤세복 선생이다. 두 번째줄 오른쪽 끝에 서 있는 이가 강용구, 맨 앞 왼쪽에서 세 번째 줄의 맨 뒤에서 선 이가 강진구이다.(제공=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

독립운동의 고장, 장정마을

1905년 조선의 대신 5명은 일제와의 강제 조약(을사늑약)에 찬성한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이 그들이다. 이를 처단하기 위해 나선 이가 훗날 단군교(檀君敎, 1년 뒤 대종교로 개명)를 중광한 홍암 나철(1863~1916)이다.

나철은 단군상을 모시고 단군 관련 문헌을 간행하며 개천절(開天節)을 제정한다. 단기연호(檀記年號)를 사용하는 등 선도(仙道) 부흥에 앞장선다.

대종교를 중광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신도 수가 20~30만 명에 달했다.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는 그의 말은 한민족에 내재한 국혼(國魂)을 움직였음이 분명하다.

대종교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도본사(교무․행정기관)를 동서남북에 두었다.

▲ 대종교 지도자 강석기 선생(제공=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
장정마을이 있는 부여군은 남도본사에 해당한다. 이곳에 시교당이 6개소, 지사가 2개나 설치됐다. 그 이유는 장정마을 진주 강씨들이 이곳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연구한 박걸순 충북대 교수(한국사학사)의 말을 들어보자.

“이 마을에서는 대종교 초유의 ‘일문이세(一門二世)에 사위원로(四位 元老)’가 배출되었다. 강석기와 그 아들인 강진구․강철구․강용구가 그들이다. 대종교 교단에서 강석기와 강진구는 중광제현(重光諸賢)으로, 강철구는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강용구는 중흥제현(中興諸賢)으로 추앙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대종교와 관련해 민족운동을 전개하거나, 인적 유대를 통해 부여지방 민족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존재했다.”

특히 강석기(사진, 1862~1932)를 주목해야 한다. 대종교에서는 강우(姜虞)로 불린다. 1909년 대종교에 입교해 1918년 교주 다음의 최고위 직책인 사교(司敎)에 임명된 인물이다. 1919년 청산리대첩을 이끈 항일전선 부대인 북로군정서 고문이었다. 그가 1932년 3월 30일 자택에서 서거하자, 당시 언론은 “대종교 거두의 별세”라고 연일 보도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며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을 추서했다.

역사적인 가치가 높은 ‘천진전’

강종모 이장과 천진전으로 이동했다. 이름은 천조궁, 단군전, 단군사당 등 다양하게 부른다. 강진구가 부친 강석기로부터 물려받은 단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유명하다. 강석기는 평양의 숭령전에 있는 단군영정을 이곳으로 봉안했기 때문이다. 천진전은 향토유적 43호이고, 단군영정은 충남도 문화재 자료 369호이다.

천진전은 퇴인봉 서쪽 자락에 서남향으로 지었다고 하는 데 멀지 않았다.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된다. 천진전 앞은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눈에 띄었다. 장정야학의 건물이 있었던 자리다.

계단을 오르니 외문이다. 붉은 바탕에 검은 해서체로 ‘개천문’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좌우로 대나무가 있는데, 개천절이 되면 태극기와 대종교(원방각) 깃발을 세운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단군전과 달리 홍살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문을 열자 단군사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판에는 붉은 바탕에 검은 전서체로 천조궁이라고 씌어 있다.

천진전은 솟을 대문형식의 삼문을 세웠다. 내부에 사당 기단 터를 마련했다. 그 위에 정면3칸, 측면1칸, 툇간둔 건물로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는데 납도리식으로 가구한 구조이다.

▲ 부여군 장정마을 천진전(향토유적 43호)이다. 독립운동가 강진구가 부친 강석기로부터 물려받은 단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유명하다. 왼쪽부터 ▲천진전 외경 ▲천진전 외문인 개천문, ▲천진전 내 천조궁이다(사진=윤한주 기자)

곽호제 청양대 초빙교수는 “1900년대 초기의 단군사당이다. 현재 국내에 단군과 관련된 사당은 100여개소가 있으나 이곳처럼 단군영정을 모신 곳은 매우 드물어 역사적, 종교적 등의 가치가 매우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았다. 건물을 받치는 기둥에는 금이 가 있었다. 실내에서 개천절을 지낸다고 하는데 성인 3명 이상 들어오기는 좁은 공간이었다. 증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됐다.

한편 천진전 건립은 주민의 힘으로 이뤄졌다.

이강오 전북대 교수는 “해방이 되자 내 나라 내 민족을 찾은 기쁨과 강석기의 애국적인 포교활동에 감화를 받은 지방민들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단군전을 짓자고 발의했다”라며 “이때 200여 호의 진주 강씨 종중(宗中)이 호응했다. 그리하여 강석기의 아들 강진구의 사재와 강씨 문중의 종재 및 기타 성금을 합해 1949년 10월 3일 현재의 단군전의 낙성식과 아울러 천진봉안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이시영 부통령이 제주를 맡았다고 한다. 봉안식에는 1만여 명이 운집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행사였다. 강상모 이사(부여문화원)는 어릴 적에 단애 윤세복 총전교(대종교 3대 교주)가 천진전을 방문했다고 회고했다. 대종교 남도본사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2003년 이전까지 10월 3일 개천절과 3월 15일 음력 어천절 양대 행사를 개최했다. 지금은 개천절만 지낸다. 제례는 대종교 전통방식을 따른다. 관리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한다.

(계속)

■ 찾아가는 방법
문의 : 부여군 고도문화사업소(전화 041-830-2511)
주소 : 충남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장정마을) 450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장암면 가는 버스를 타면(25분-30분) 된다.

■ 참고문헌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 부여 장정마을(대원사2006)
박걸순, 부여 장정 진주강씨 문중의 대종교 신앙과 민족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2005)
21세기 부여신문 공동취재반, 부여의 마을이야기(부여군2013)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대흥기획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