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조 단군성조봉향회장이 단군성전건립비를 가리키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공주시민들이 1981년 9월 6일 봉황산에 모여들었다. 단군성조신단을 건립하는 자리였다. 그들은 “단군의 성덕을 기리고 영원히 후손에 물려주자”라며 한마음으로 참배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은 참담했다. 1967년 박윤교 단군성봉향회장과 임원들이 앞장서 벌인 단군성전 건립의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산성에 있던 약단(畧壇)을 모신 위형(威形)도 허술했다. 서상모 회장과 지역 주민이 힘을 모았다. 공주향교가 부지를 제공하고 봉사단체의 지원을 받았다. 비로소 천제를 지낼 수 있는 신단이 마련된 것이다.

33년이 흘렀다. 비문을 보니, 당시 역사(歷史)가 되살아나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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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건립하려는 데 돈이 없으니까 단만 세웠다. 민간단체에서 했는데 힘이 든 거지. 공주의 유지들이 민족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문을 읽어보니 그곳에는 정부나 기업의 돈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었다. 홍익정신을 후손에 물려주고자 십시일반으로 모은 공주시민의 정신(spirit)이 서려 있었다.

▲ 윤석조 단군성조봉향회장이 단군성전을 가리키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365일 관람하는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단군성전의 규모는 3천 평이라 꽤 넓었다. 버스가 들어올 수 있는 주차장도 갖추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홍살문 왼쪽으로 이동했다. 2001년 10월 3일에 세운 단군성전건립비문이다. 김철민 대연건축에서 문화재설계를 맡았고 시공은 김중만 지연건설(주)에서 했다.

당시 이사로 참여했던 윤 회장은 단군성전을 문화재로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문화재로 등록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라며 속상한 마음을 비쳤다.

입구가 아닌 동문(東門)으로 이동했다. 윤 회장이 자물쇠를 열자 비로소 문이 열렸다. 이어 정문을 열었다. 잔디밭을 두른 담장 안에 단군성전이 있었다. 오른쪽은 앞서 소개한 옛 신단이다.

▲ 단군성조신단에 관해 설명하는 윤석조 단군성조봉향회장(사진=윤한주 기자)

성전의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나왔다. 고려 시대 건축양식인 배흘림으로 한 것이다. 현판은 한국 근현대 서예의 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응현(金應顯, 1927~2007) 서예가의 작품이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을 펼치니 국조단군의 영정이 있다. 국가에서 지정한 표준영정과 같았다.

성전 왼쪽은 봉황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다. 이어 윤 회장은 성전을 중심으로 곳곳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국립공주박물관, 공산성, 공주향교 충청남도역사박물관 등이 멀지 않았다.

- 공주가 문화도시네요?

“아~ 절대적이야, 성전도 당연히 거기에 편입이 되어야 한다. 조선국창건단군성조(朝鮮國創建檀君聖祖)이니깐. 홍익인간 정신으로 나라를 만드신 분이다. 문화도시에서 이것이 어울려야 한다. 그러니까 공주 늙은이들이 그렇게 고생한 거여.”

▲ 봉황산 단군성전에서 내려다본 공주 시내의 모습(사진=윤한주 기자)

- 바라는 점이 있습니까?

“단군성전이 문화재로 지정되어야겠고, 앞에 빈 데가 있어. 스물 댓평인데, 2억 원을 들여서 관리사가 지낼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여. 그러면 문을 항상 열어놓고 사람들이 오가며 참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람에요.”

성전을 내려왔다. 윤 회장은 세월호 사고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세월호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 된 거거든. 돈만 중시하다가 인간이 뭐고 의리이고 책임이고 아무것도 질 줄 모르는 국민으로 변했어. 외국인들이 얼마나 한국 사람을 무시하겠어.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해, 정신을 잃은 거여. 고귀한 홍익정신을 가르쳤다면 그런 일이 안 생겨. 국민적 각성이 필요할 때가 되어버렸어.”

▲ 공주시 반죽동 봉황산(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단군성전이 있는 봉황산은 어떠한 산인가?

성전이 있는 봉황산(鳳凰山, 147m)은 역사가 깊다. 한국지명유래집을 보면 “조선시대 선화당(宣化堂)의 터가 있던 주산(主山)”이라고 나온다. 선화당은 충청도 관찰사(현 도지사)가 집무하던 곳을 말한다.

봉황은 알을 품고 있는 봉조포란형(鳳鳥抱卵形)의 형국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됐다. 봉황은 오동나무에 살면서 예천(醴川, 감천甘泉)의 물을 마시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고 한다. 천자 또는 왕권을 상징한다.

반죽동(班竹洞)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봉황이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공주교동초교, 공주여중, 공주대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등 학교가 많다. 인재양성의 요람임을 알 수가 있다.

대일항쟁기에는 일본인의 신사(神社)가 있었다고 한다. 식민지배의 상징은 조선신궁이자 신사다. 광복 이후 신사를 허물고 단군성전을 세운 경우가 많았다.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야하기 때문이다. 봉황산 단군성전이 공주시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 단군성전을 찾아가려면 단군성조봉향회(041-852-4554)로 전화를 걸면 좋다. 내비게이션 또는 웹 지도상에 ‘무령로 154’라고 주소를 입력하면 된다.

▲ 내비게이션 또는 웹 지도상에 ‘무령로 154’라고 주소를 입력하면 된다(=Daum 지도 캡션)

<공주 단군성전 16편, 17편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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