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성산에서 내려다본 부여군의 모습이다. 국보9호인 정림사지5층석탑이 보인다.(사진=윤한주 기자)

지난달 29일 금성산 정상(121m)에 올랐다. 부여가 한 눈에 들어왔다.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5층석탑, 부여군청이 보였다. 강 건너는 부산(浮山)이다. 오른쪽으로는 부소산이다.

583년 백제 성왕은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遷都)한다. 이후 123년 동안 백제의 전성시대가 열린다. 당시 13만여 호에 5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았다고 한다. 오늘날 부여군민이 ‘7만 인구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과는 다른 역사가 있었다.

부여의 자랑이라고 하면 문화자원이다. 군에 있는 문화재만 245개에 달한다. 국가지정문화재는 52개(국보 4개, 보물 18개, 사적21개, 천연기념물2개, 민속자료5개)가 된다.

거리에서 만난 성왕과 계백 장군 동상은 1400년 전 백제 시대가 부활했음을 알리는 듯 했다. 경주시는 신라, 구리시는 고구려를 내세운다. 삼국의 역사가 지자체의 문화관광산업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를 나무랄 이유는 없다. 다만 우리의 역사가 지역에 따라서 나눠지고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역사가 있었다. 이는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백제의 고도(古都)로 알려진 부여의 숨은 역사를 알아보자.

부여인, 그들이 원했던 세상은?

성왕은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꾼다. 백제는 왜 부여라는 이름을 택했을까? 이에 대해 부여를 단순한 지명(地名)이 아니라 국가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한성 동국대 교수는 “고대국가 부여는 만주 벌판을 대표하는 강대국이었다. 고구려의 주몽은 이 나라 출신으로 압록강변에 나라를 세우면서 부여란 나라를 등에 업으려고 국호를 졸본부여라 했다. 고구려로 바꾼 것은 그 뒤에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진 나라이다. 한강변에서부터 밀려 백마강(=금강)까지 온 백제의 왕 성왕으로서는 자랑스럽던 대륙국가 부여를 남쪽 땅에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은 남부여, 수도의 이름은 부여로 개칭하여 면모를 일신하고자 했다”라고 밝혔다.(CNB저널 346호, 2013년)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부여의 원류가 단군조선이라고 말한다.

“만주 땅에 있었던 부여라는 나라는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이은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백제는 부여에서 갈라져 내려온 나라로 부여의 정통을 이은 나라였다. 그러니 백제가 왜 수도이름을 부여라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단군문화기행 2000)

흥미로운 것은 부소산이 단군왕검의 아들과 이름이 같다는 점이다.

조선 숙종 2년(1676) 북애(北崖)가 저술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보면 단군에게 아들이 있었다. 부루(扶婁),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가 그들이다.

박 교수는 “백제인들은 부여의 북악산을 단군의 둘째 아들 부소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이라고 했다. 백제의 건국자 온조가 본시 부여라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그 후손을 스스로 부여 씨라고 자처하였고 그래서 수도이름을 부여라고 한 것이다.(같은 책)”라고 설명했다.

백제의 눈으로 본다면 부여는 1400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역사로 본다면 어떠할까? 반만년 홍익정신을 이은 단군의 땅, 부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당나라와 손잡은 신라 연합군에 의해 무너진다.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정림사지5층 석탑에 새긴 승전의 글에서 그 비극의 역사가 남아 있다.

▲ 국보9호인 정림사지5층석탑이다. 백제는 당나라와 손잡은 신라 연합군에 의해 무너진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이 탑에 승전의 글을 남겼다. 비극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사진=윤한주 기자)

신라 경덕왕은 부여를 행정구역 중의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쳤다. 그러다 1905년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국권을 강제로 빼앗긴다. 조국의 불씨는 꺼져가고 있었다. 누가 살려낼 것인가? 그것은 민초들이었다. 전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이들 가운데 1909년 1월 나철(1864∼1916)은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국망도존國亡道存)”며 단군교(檀君敎, 훗날 대종교로 바뀜)를 중광했다. 동학이나 증산교처럼 창교(創敎)라고 하지 않았다.

이는 단군조선 이래 부여의 대천교(大天敎), 예맥의 무천(舞天), 마한의 천군(天君), 신라의 숭천교(崇天敎), 고려의 왕검교(王儉敎) 이후 700년 만에 맥을 이었기 때문이다.(신단실기, 1914)

이때 나철과 함께한 사람이 부여 출신, 강석기(姜錫箕)이다. 그는 1914년 나철을 대신해 백두산에 올랐다. 혈서로 제천했다. 1920년에는 구월산 삼성사(三聖祠), 1924년에는 마니산 참성단(塹城壇)에서 제천수도한 것은 유명하다.

그의 세 아들(진구, 철구, 용구) 또한 단군교에 입교했다. 아버지를 따라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들이 살던 마을은(장암면 장하리) 여섯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전국에서 유일하다.

강진구는 1920년경 아버지로부터 단군의 영정인 천진(天眞)을 물려받는다. 이어 1949년 고향에 천조궁(天祖宮)을 건립한다.

또 한 사람이 있다.

주역의 대가인 이달(李達, 1889~1958)이다.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달은 1889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유․불․도교에 통탈했다. 특히 주역에 밝아 사람들은 주역의 달인이라고 불렀다. 한국전쟁 직전 3백여 호를 이끌고 안면도로 가 전쟁의 참화를 피하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전쟁이 끝난 뒤 가족과 제자들을 부여로 옮겨 살게 했다. 은산면 가곡리에 삼일학원(三一學院)을 설립했다. 삼일학원 뒤편에 단황단(檀皇團)을 모아 국조단군을 받들고 홍익사상을 알렸다고 한다.

백제와 불교문화에서 한국의 정신(Korean Spirit)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에게 말하고 싶다. 백제 이전에 부여와 단군조선의 역사가 있었다.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 이전에 한국선도(韓國仙道)가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