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을 모시며 반평생을 살아오셨는데, 그처럼 단군숭배에 정열을 바치고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한 나라의 국조, 다시 말해 제일 높으신 할아버지를 섬기고 바로 아는 일은 그 뿌리를 찾고 당당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으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병호 선생은 대전일보(1991년 11월 6일)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조 선생의 조부는 순종 때 평양감사를 지낸 조충현(趙忠顯)이다. 조병호 선생은 6세 때 한학을 공부했다. 그의 스승은 33인 민족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다. 어릴 적부터 나라정신을 배우게 된 계기다.

조 선생은 서예가로도 유명하다. 원래 중국 한나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기와 무늬 그림에 글을 쓰고 전서로 주석을 다는 와당문 서예체를 쓰는 서예가로는 거의 유일하다.

▲ 생전의 조병호 선생(1914∼2005)의 모습(사진=조금상 씨 제공)

홍익인간 정신을 가르친 ‘교육자’

그가 읽은 책은 북애자의 <규원사화>를 비롯하여 단군에 관한 사서인 <신지비사>, <해동비록>, <제왕연대력>, <조대기>, <단군고기> 등 20여 종에 달한다. 이후 <단군세기>, <만주원류고>, <산해경>, <후한서> 등에서 발췌한 단군의 기록을 토대로 10여 종의 책을 엮기도 했다.

조 선생은 <감시만어>의 저자이자 대종교 독립운동가인 이시영 부통령(李始榮, 1868∼1953)이 함께 일하자며 정치계에 들어올 것을 제의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고향인 청양군 정산면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지인과 정산고등공민학교(현 정산중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조 선생은 학생들에게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을 가르쳤다. 1951년의 일이다.

그는 “사람에게 혼이 없으면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우리의 혼은 단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1963년 공주교대 강사로도 활동했다. 이때 단군전을 건립하는 남지훈 여사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한가족이 됐다. 이후 충남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 단군전은 발전을 거듭했다. 계룡시 신도안 9천여 평의 땅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1984년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철거해야 한다는 통지를 받는다. 당시의 이전에 대해 조 선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내 모든 정성을 쏟아 세운 신도안의 단군사당을 버려둘 수 없어 담 쌓은 돌까지 모두 옮겼어요. 트럭으로 모두 3백 대분량이었지요.”

현재 정림동 단묘는 1천 5백 평의 대지에 자리 잡고 있다.

꿈속에서 만난 ‘환인, 환웅, 환검’

앞서 25편에서 남지훈 여사가 현몽을 계기로 단군전을 건립했다고 밝혔다. 조 선생도 같은 경우가 있다.

그는 1987년 꿈속에서 환인, 환웅, 환검(단군)의 3대 할아버지가 쓰러져서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를 구해달라고 했다. 며칠 후 부여에 가고 싶어 길을 떠났다. 보령 성주사 터에 버려진 석상을 발견한 것이다. 현몽한 할아버지의 말씀이 계시처럼 생각나서 사정을 말하고 모셔왔다고 한다. 현재 단묘 뒤에 있는 삼신석상이 그것이다.

▲ 대전 서구 정림동 단묘 뒤편에 자리한 환인 환웅 환검(단군) 석상이다(사진=윤한주 기자)

조 선생은 제각 앞 정원에는 조선시조신성황제묘정비(높이 5m, 너비 90cm)를 세웠다. 이어 삼일신고, 단군팔조교 등을 새겼다.

제사는 일 년에 두 번 지낸다.  어천절(음력 3월 15일)과 개천절(음력 10월 3일)에 유교식으로 치른다. 제관은 충남도지사를 비롯하여 대전 충남도의 기관장이 서도록 했다.

“제관을 기관장들이 맡도록 한 것은 국조는 나라가 모셔야 할 일이므로 기관장들을 제관으로 세워야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1993년 자신의 전 재산과 다를 바 없는 단묘를 대전대학교에 기증했다. ‘민족의 얼을 드높이는 교육을 위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학교 측은 “선생의 뜻에 따라 민족사 고취를 위한 현장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라고 안내문에 밝혔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상 씨의 말이다. 지난해까지 학교 측에서 양대 제사를 지원한 것도 올해부터 끊어졌다고 한다. 올해 어천절 행사는 조 씨 혼자서 지냈다고 밝혔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기증 21년 만에 위기를 맞은 단묘 스토리를 다음 편에서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