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논산 개태사 입구(사진=윤한주 기자)

지난 26일 논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303번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리니 개태사(開泰寺)에 도착했다. 이곳은 논산 8경 중의 6경으로 유명하다.

국보 213호 금동대탑, 보물 제219호 삼존석불입상, 충남민속자료 제1호 철확, 충남문화재자료 제247호 5층 석탑과 제275호인 석조, 충남도유형문화재 제91호 비로자나불 등 문화재의 보고(寶庫)다.

단군문화로서 주목한 것은 유물이 아니라 인물이다. 개태사를 지은 태조 왕건(王建, 877~943)과 임진왜란으로 소실한 개태사를 중건하고 창운각(단군각)을 세운 김광영(金光營, 1883~1969)이다. 2편으로 나눠서 소개하겠다.

선도문화로 보는 ‘고려(高麗)’

개태사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지은 사찰로 유명하다. 936년 황산군의 마성(馬城)에서 후백제의 신검(神劍, ?~936)이 항복한다. 견훤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운 지 36년 만이다. 왕건은 삼국통일의 공(功)을 부처와 산신에게 돌린다. 이를 기리기 위해 개태사를 건립한 것이다.

<고려사> 태조세가 19년(936)조를 살펴보면 “이해에 광흥사, 현성사, 미륵사, 사천왕사 등을 창건하고 또 개태사를 연산에 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4개의 절은 개경이나 인근에 건립했다. 개태사만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개태(開泰)는 태평의 시대를 연다는 뜻이다. 오랜 전쟁을 끝내고 평화와 번영을 염원한 것이다. 이어 황산을 하늘의 보호를 받은 산이라고 하여 천호(天護)라고  바꾼다. 황산이라고 하면 백제 계백장군이 김유신 장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다. 영화 <황산벌>로도 제작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왕건은 인도에서 온 석가 부처 못지않게 하늘과 산신을 중요하게 여김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신앙심에는 선도문화(仙道文化)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왕건은 “나는 삼한 산천 신령들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이어 즉위 26년 만에 발표한 <훈요10조> 가운데 6조를 살펴보자.

“나의 소원은 연등과 팔관에 있는 바 전자는 부처를 섬김이요 후자는 하늘, 오악, 명산, 대천, 용신을 섬김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지와 의식의 가감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고 이 양대 제전을 군신동락하여 경건히 행하라.”

주목되는 것은 연등과 팔관이다.

강병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에서 “두 행사는 본래 선도문화의 핵심이라 할 천신제였다”라며 “팔관이라고 하여 중국의 이름을 따왔으나 그 내실은 고조선에서 신라를 거쳐 고려로 이어져 온 천신제 또는 제천행사였다”라고 설명했다.

민속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이능화는 <조선도교사>에서 “이 제사(팔관회)를 주관하는 사람을 선가(仙家)라고 하였다”라며 “선가는 신라의 국선이다. 그 기원은 삼한의 소도제관이요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라고 보았다.

▲ 충남 논산 개태사 태조 왕건의 진영을 봉안한 어진전(사진=윤한주 기자)

어진을 봉안한 진전 사찰

묘청은 왕에게 권해 임원궁성을 축성하고 궁중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했다. 8명의 성인 중에 네번째가 구려평양선인이다. 그 실체는 연등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강 연구원은 ‘단군’이라고 주장했다.

“연등제가 외형적으로 불교의 외투를 입었으나 그 이면에 평양선인, 즉 단군의 존재가 있음을 시사했다. 평양은 도선이 점친 곳으로 단군왕검의 유택이다.”

이는 ‘삼국사기’ 동천왕 21년 조에 ‘평양은 선인(仙人) 왕검의 택(宅)’이라고 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왕검이란 단군을  말한다.

한편 개태사는 왕건의 얼굴을 그린 진영(眞影), 즉 어진(御眞)을 봉안한 진전(眞殿) 사찰로 불린다. 기록에 따르면 나라에 변란이 발생할 때 제사를 주관했다. 또한 국가 대사에 대한 길흉을 점치는 사찰이었다. 공민왕은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마음으로 개태사에 사람을 보내 그 가부를 점치기도 했다.

현 어진은 1992년 개경 현릉에서 출토된 태조 왕건의 청동상을 참고해서 수당 김종국 화백이 그렸다. 수당은 조선조 마지막 어용화사인 이당 김은호의 제자다.

- 24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