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은 미래도시다. 대덕연구단지와 과학 인재들이 모인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가 있다. 1993년에는 세계박람회인 엑스포를 개최했다. 서울에서 KTX로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잘 닦인 도로와 아파트, 이곳에서 ‘단군(檀君, Dangun)’을 찾을 수 있을까?

충청도 단군문화를 찾기 위해 증평군, 청원군, 충주시, 공주시, 부여군, 서산시, 논산시 등 7곳을 다녀왔다. 이곳에서 만난 도민들은 구수한 사투리로 단군 스토리를 전했다.

대전시민은 단묘(서구 정림동 52)에 대해 물어봐도 아는 이가 없었다.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먼 거리였다. 말이 시에 있지 실은 촌이라고 봐야 한다. 가고 싶다면 버스를 경유한 택시를 타거나 자가용을 추천한다. 

이 단묘는 조병호 선생(1914∼2005)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대전대학교에 기증하면서 소유권도 이전됐다.

현장을 찾으면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는 일이 많다. 조 선생의 손자인 조금상 씨(59)의 증언과 전문자료를 참조해서 히스토리를 정리한다. 창립자는 조 선생이 아니었다.

▲ 대전 서구 정림동 단묘 전경(사진=윤한주 기자)

단군의 현몽

단군은 꿈을 좋아한다. 그의 계시는 후손의 꿈을 통해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단군영정을 그린 신라 때 화가 솔거(560~?)가 대표적이다. 수천 년 전의 인물을 어떻게 만났겠는가? 솔거의 그림은 꿈속의 단군이다. 대일항쟁기 최초로 단군전을 지은 이진탁 선생도 계기는 단군의 현몽(現夢: 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남)이다.

이 선생의 작산 단군전(作山 檀君殿)은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 용동리 작산마을에 있었다. 3층 건물의 2층에 단군 영정을 봉안했다. 일제는 이 선생의 단군전 건립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보고 탄압했다. 그는 대전 감옥에 3개월 동안 투옥됐다. 해방 후 어천절과 개천절 행사를 지냈다. 작산 단군전은 1976년 작산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철거됐다.

단묘는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남선리에 있었다. 1984년 군사시설이 들어서자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창립자는 남지훈 여사(南芝薰, 1918~1997)이다. 단군을 모시게 된 것은 남 여사의 꿈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단군전을 짓고 싶다면 꿈속에서 단군을 만나야 할 것 같다.

▲ 왼쪽부터 생전의 조병호 선생과 남지훈 여사의 모습이다. 세번째는 손자 조금상씨. 대전 서구 정림동 단묘의 창립자는 남지훈 여사이다.(제공=조금상씨)

정성과 후원으로 성전을 건립하다!

조금상 씨는 “할머니(남지훈)가 단군을 모시고 있었다. 할아버지(조병호)를 만나면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남 여사는 조 씨의 친 할머니가 아니다. 조병호 선생에게 본처가 있었다. 조 씨는 작은 할머니라고 불렀다.

남 여사는 충남 한산 출신이다. 예산에서 성장했다. 결혼하였지만, 20대에 남편과 사별했다.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남 여사는 친가에 돌아온 후부터 산사山寺를 찾아다니며 기도생활을 시작했다. 계룡산 기도 중에 단군의 현몽을 얻었다. 그의 계시에 의하여 남선리 석각골에 단군전 건립을 계획했다.

남 여사는 1958년 충남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에 주택을 세우고 그 동쪽 산기슭에 단군전을 착공했다. 건평 10여 평으로 된 목조 와가로 설계했다. 이때 서울에 살고 있는 홍정초의 협조를 받았으나 겨우 상량上樑을 해놓고 중단한 채 4년을 방치했다.

남 여사는 1963년 경작답耕作畓을 매각한다. 이때 청양에 살던 조병호의 협조를 얻어 다시 착공하려고 했다. 그러나 경비가 부족해 내부 시설을 끝내지 못한 채 완공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본 광명도(光明道)의 정효순(鄭驍橓)이 자신의 교인을 동원하여 내부 시설과 외부 환경의 정리를 해주어 1964년 3월에 이 전각에 천진을 봉안하게 됐다.

이강오 전북대 교수는 <한국신흥종교총람>에서 “남 여사는 오랜 기도생활에 의하여 접령(接靈)까지 하였다고 하지만 무속적인 행위로서 재물과 신자를 구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의 단군전 건립이 시일을 끌고 부진했던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광명도의 정효순이 본전(本殿)의 낙성 후에 이곳을 거점으로 광명화운동을 한다고 천단 앞에 교인을 모아 염파방송念波放送을 하는 것도 곧 물리쳐 버렸다. 이 단군전은 어떠한 종교단체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인도 없으려니와 또한 이를 운영하기 위한 조직체도 없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조병호 선생은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이 교수는 조 선생을 남 여사의 후견인으로 짧게 소개했다. 그러나 자료를 조사해보니 그는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학교를 세워 후학들에게 단군사를 가르친 교육자이었다.

∎ 대전 단묘 찾아가는 방법(바로가기 클릭)

26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