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를 닮은 땅끝마을 전경. 네티즌이 뽑은 대한민국 최고 여행지로 전남 해남이 선정됐다(사진=해남군청 제공)
 
육지의 끝이다. 
지난달 31일 전남 해남군을 찾았다. 이곳에 구월산 삼성사에서 가져온 단군영정이 있기 때문이다.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우리나라가 ‘삼천리 금수강산’인 이유를 “해남 땅 끝에서 서울까지 천리이고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가 2천리”로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도 이곳을 남쪽 기점으로 둔다. 
 
군 단위로는 해남의 땅이 전남에서 제일 넓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해남행 버스에 많이 오른다. 이들은 땅 끝 마을, 송호해수욕장 등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관광객은 모른다. 북에서 건너온 단군이 이곳에 터를 잡고 있다는 것을. 
 
먼저 단군전 건립의 스토리를 만나보자. 이번에도 대전 단묘처럼 역사를 바로 잡아야할 것 같다.
 
고등학생 vs 대종교인
 
구월산 삼성사 단군영정을 해남으로 가져온 이는 백운 이종철(白雲 李鍾轍, 1879-1938)이다. 그가 어떻게 영정을 가져왔는지에 대해 2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 번째는 백운 선생이 휘문고등학생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영정을 가져왔다는 일화다. 해남군청이나 주민들의 이야기도 같다. 
 
백운은 삼성사를 방문했다. 그는 놀랐다. 건물이 낡아서 무너질 형편이었다는 것. 또한 조선총독부 소유라는 팻말을 발견했다. 그는 “이대로 두었다가는 일본인들에 의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라며 인솔교사와 상의하여 단군 영정과 제기(祭器) 등을 몰래 감추고 돌아왔다.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단군문화기행>에서 백운의 조카 이점용씨를 통해 인솔교사는 홍암 김 선생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김 선생이 아니라 나철 선생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철은 휘문고에 교사로 재직한 일이 없다. 따라서 홍암 김 선생이 홍암 나철 선생(弘岩 羅喆, 1863년 ~ 1916년)이라고 하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두 번째 이야기다. 
 
백운은 일본이 국권을 침탈하자 조국광복을 고민했다. 그는 단군숭배를 통해 민족의 단결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어 대종교에 입교하고 구월산 삼성사를 찾아갔다. 그때 낡은 삼성사에 조선총독부 소유라는 표시가 있음을 본다. 즉시 삼성사를 고향으로 옮길 것을 결심했다. 
 
1923년 전남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 뒷산에 삼성사(三聖祀)를 세우고 가져온 단군영정을 모셨다. 이강오 전북대 명예교수가 연구한 결과를 <한국신흥종교총람>에 수록한 내용이다. 
 
이야기를 비교해보자. 
 
공통점은 삼성사 건물이 낡았고 조선총독부 소유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 현진건의 <단군성전순례기>는 일제가 1911년 구월산 삼성사를 공매에 붙여 헐어 버렸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점에서 관리가 허술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운이 단군영정과 제기를 고향으로 옮겨온 점도 같다. 
 
차이점은 백운의 신분이다. 고등학생인가? 아니면 대종교인가? 라는 점이다. 
 
먼저 학생이라는 점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백운이 고등학생이었다면 1900년 이전이 된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탈을 받기 전이다. 삼성사가 조선총독부 소유일 수도 없다. 
 
백운이 대종교인이었다면 삼성사 방문은 ‘성지순례’다.
 
1909년 단군교(檀君敎, 이후 대종교로 개명)를 중광한 홍암 나철이 1916년 일제의 침탈에 맞서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죽음을 택한 순교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향으로 영정만이 아니라 삼성사를 그대로 옮겨놓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10대의 의협심이 아니라 44세 백운의 결단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백운의 삼성사는 경주 이 씨 문중의 도움으로 유지가 됐다. 제례는 춘추로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자 묘호廟號도 내걸지 못했다. 한 동안 제향도 올리지 못했다.
 
해방이 되자 전환점이 마련된다. 삼성사를 벽지에 둘 것이 아니라 군청 소재지로 옮기자는 주민의 발의가 생긴 것이다. 이는 전국적으로 일제 신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단군성전을 건립하려는 운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57년 당시 군수의 주관으로 단군전건립위원회를 조직한다. 군민들이 낸 성미(誠米)와 특지가의 성금이 모인다. 이듬해 서림공원 내 단군전이 신축된다.
 
삼성사가 있던 금풍리에는 1968년 ‘단군영당유허비’를 세웠다. 경주이씨 이성술이 찬하고 광주이씨 이문수가 글을 썼다. 이 비는 단군신위 봉안의 유래를 밝혔다. 백운의 문비는 선생의 생애를 담아 1994년에 세웠다. 
 
▲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 내 단군 영당 유허비와 백운의문비. 현재 서림공원 내 단군전이 이전의 곳이다. 비석의 높이는 2.2m, 너비0.6m, 두께0.2m이다.(사진=해남군청 제공)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는 어떠한 곳인가?
 
북한의 대표적인 단군유적으로는 평양 숭령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평안도 묘향산 단군굴 등이 있다. 
 
이 중에 구월산은 아사달산 또는 궐산으로 불렸던 곳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곳이자 마지막으로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 환인(桓因)·환웅(桓雄)·환검(桓儉:檀君)을 모시고 있다. 삼성당으로 불려오다가 1472년(성종 3) 삼성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연원은 사당의 연혁을 기록한 <삼성당사적>에 따라 10세기 이전으로 본다. 또한 신라말로 보는 학자도 있다.
 
해마다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는 올릴 수 없었다. 홍암 나철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 도착해서 제자들과 제천의례를 올린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 땅은 우리 한배께서 하늘에 오르신 곳이라 예로부터 사당을 세우고 신상(神像)을 모시어 향화(香火)가 4천 년간 끊이지 아니하고 이어왔는데 불행하게도 이 몇 해 동안에 제사를 폐하고 수호조차 없이 하여 사당과 제실이 무너지고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게 되었으니 슬프다! 존귀하신 삼성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자손 된 자 어찌 감히 안전 되기를 바라리오. 내가 대교를 받든지 8년에 이제야 비로소 이 땅에서 선의를 받들게 되니 지극한 원(願)을 마치었도다."
 
이때 나철이 마지막으로 올린 제천의례는 오늘날 대종교 의례의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그 이름을 ‘선의식’이라 하고 있다. 선의식의 ‘선(示 + 亶)’자는 ‘천제 선, 제사지낼 선’자로서 한얼님(하느님)에게 제사 지내는 제천의례라고 말한다. 
 
29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