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은 광주의 진산(鎭山)이다. 광주는 전라도에 있는 데 큰 읍이다. -고려사"
"무등산은 현의 동쪽에 있는 진산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난 4일 광주를 찾았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 30분이 걸렸다. 광주 단군문화유산으로는 2곳을 꼽을 수가 있다. 무등산 천제단과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단성전이다. 매년 개천절이 되면 천제를 지내고 기념행사를 치른다고 한다. 그러나 단군과 천제문화를 찾기 위한 시민의 노력은 쉽지 않았다. 시련과 좌절의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됐다. 5.18민주화운동의 성지에서 단군문화를 차례로 만나보자.

▲ 광주의 진산, 무등산 전경(=자료)

제후국 조선에서 천제단이 ‘등장’한 이유?

조선시대는 고종이 원구단을 세우기까지 천제를 지낼 수가 없었다. 천제는 천자인 중국 황제만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선은 산천제만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무등산 천제단이 등장한다. 1789년(정조 13) 경에 편찬된 '광주목지'의 기록이 그것이다.

물론 오래전부터 무등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신라와 고려 때는 국제(國祭)를 모셨다. 그러다 조선에 들어와서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읍제를 지내는 곳으로 강등된다. 이후 바뀐 것은 시대적인 변화에 있었다.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교수는 정부와 민간 측에서 천제를 올리고자 했던 욕구가 맞물린 결과로 해석한다.

“17세기 후반은 잦은 기근으로 크게 몸살을 앓던 때이다. 여기에 청 왕조의 안정과 서학의 도입 등으로 새로운 세계관의 확산이 결부되어 정부 차원에서 천제 거행을 시도하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비록 공식적으로 천제는 금지되었지만 하늘 혹은 천신을 의례화하는 민간 관행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산신제 성격의 마을 신앙에서 천신의례가 간접적으로 표출되어 산신제는 천신제로 이해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민간에서 산제를 거행하는 공간인 산제단이 천제단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정부 측과 민간 측의 천제 거행 욕구 속에서 무등산 천제단이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천제단은 어느 곳에 있었을까? 무등산 정상이 아니라 중간부라는 것이 김 교수의 분석이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주요 광주지도와 무등산도(無等山圖)에서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1872년 편찬된 호남읍지 속의 광주읍지에 첨부된 광주지도에는 증심사와 서석대 사이의 구릉지대에 천제단이 표기되어 있다.

천제단은 대일항쟁기 이후 비운의 역사를 맞이한다. 일제가 천제단 일대의 임야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어 천제단을 허물어버렸다. 이를 복원한 사람은 남종 문인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1891~1977)이다. 의재는 천제단을 민족의 제단으로 신성시하고 이곳에 단군신전을 건립하여 민족긍지의 구심점을 마련하고자 앞장섰다고 한다. 그는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969년 서울 조흥은행 화랑에서 기금마련을 위한 한국화 개인전을 열었다. 여기서 얻어진 당시의 돈 5백여만 원을 기금으로 희사하여 '무등산 개천궁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는 1974년 12월 21일에 기공식까지 가진 바 있었으나 이 대역사는 아직도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매년 10월 3일이면 광주민학회가 천제단에서 개천절 제전을 집전해왔다.

현재 천제단은 천제동 서사면의 동쪽 귀퉁이에 복원되어 있다. 형태는 원형이다. 잡석을 원통형으로 쌓고 앞부분에 제물을 놓을 수 있는 단이 조성되어 있다.

무등산신의 ‘신령함’이 놀라워!

한편 무등산은 신산(神山)이자 무당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배경은 무등산신의 영험함에 있었다.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제2차 일본원정에 나선 1281년(충렬왕 7)에 광주출신 김주정金周鼎은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런데 무등산신이 깃발에 달린 방울을 세 번이나 울리는 신통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조선초기에는 백성과 무당들이 무등산에 들어가서 빌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산에 올랐는지 영암 출신 최충성(1458~1491)이 기록했을 정도다.

“백성들이 다투어 따름이 마치 저자처럼 붐비었다. 먼 지방 사람들이 곧 마른 양식을 싸들고 해마다 거듭 이르렀는데 나주로부터 광주에 이르기도 하고 광주에서 나주에 이르기도 하였으니 두 곳을 왕래하는 길은 사람들이 어깨를 서로 갈며 옷섶을 연이어 장막을 이루었고 그 중에는 어린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도 있고 처와 첩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육지에서 제주도로 가는 사람들은 무등산 신사에서 무사 항해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 또한 농사철에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을 경우 광주 목사가 무등산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그런데 광주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용추라는 곳이 별도로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등산 신사에서 또 기우제를 올렸다. 김덕진 교수는 “광주 사람들은 용추의 용신보다 무등산의 산신이 더 영험하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해방 후 1990년대까지 증삼사 뒤쪽 무당골에는 굿판이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무등산신의 영험한 기운을 받기 위해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무당산이라고 불린 이유를 알겠다.

참고문헌
김덕진, 전라도 광주 무등산의 신사와 천제단, 호남사학회 2013년
서해숙, 무등산 숭사의 전통과 현대적 계승, 남도민속학회, 2012년
박내경, 무등산 천제단 개천제 신앙고, 남도민속학회, 2005년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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