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역사가 사마천의 말을 빌어 독립투사의 심정을 표현한 대사이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에 따라 죽음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다.

일제에 맞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불태운 독립운동가들의 죽음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그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다. 광복 77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사에서 불꽃으로 살다간 이들의 역사가 제대로 조명되고 있는지 이동언 박사를 만나 들어보았다.

이동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이동언 박사는 독립기념관 개관 초기부터 연구위원으로 독립운동가 유족과 후손을 찾아 독립운동 자료를 수집, 연구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이동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이동언 박사는 독립기념관 개관 초기부터 연구위원으로 독립운동가 유족과 후손을 찾아 독립운동 자료를 수집, 연구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40여 년간 독립운동사를 연구해 온 이동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장(전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광복 이후 남북분단과 이념 갈등 속에 독립운동사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라고 지적하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사로 올해 80주년을 맞는 1942년 ‘좌우통합 운동’과 ‘임오교변’을 손꼽았다. 먼저 좌우통합운동을 살펴본다. 

좌우통합 운동은 1942년 중국 충칭에서 민족주의 계열인 김구 주석의 한국독립당과 약산 김원봉 선생이 창당한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이 당黨‧군軍‧정政 통합을 위해 5차례에 걸쳐 회의한 것을 말한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후 분산된 항일운동의 역량을 결집하고자 열린 것이다.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Center for Korean Studies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가 소장한 1942년 좌우 독립운동가들의 '당(黨)·군(軍)·정(政)'통합을 위한 회의 일지 원문 사진. [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Center for Korean Studies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가 소장한 1942년 좌우 독립운동가들의 '당(黨)·군(軍)·정(政)'통합을 위한 회의 일지 원문 사진. [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2021년 12월 미국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수집한 ‘조지 맥아피 맥큔(George McAfee McCune) 자료집’에서 해당 기록 문건이 발견되어 올해 4월 국가보훈처가 공개했다. 이 문건은 독립운동 세력 간 이념과 정파를 떠나 좌우통합을 하고자 한 사실을 밝히는 자료이다.

그동안은 김원봉이 중국 관내에서 결성한 최초의 한인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하게 된 것이 중국 군사위원회 지시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건을 보면 편입 결정에 우리 독립운동 세력 간 제1차 회의에서 군대 통합에 대한 양당 간의 구체적 합의가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로 확인된다.

통합회의는 난항과 결렬도 있었지만, 같은 해 10월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조선민족혁명당 인사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임시정부 역사상 최초의 좌우통합 회의를 개최했다.

1942년 임시정부 역사상 최초로 조선민족혁명당 인사가 의원으로 선출된 임시의정원 회의. 민족주의계열의 김구 선생과 사회주의 계열의 김원봉 선생 등이 함께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1942년 임시정부 역사상 최초로 조선민족혁명당 인사가 의원으로 선출된 임시의정원 회의. 민족주의계열의 김구 선생과 사회주의 계열의 김원봉 선생 등이 함께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이동언 박사는 “통합의 결과로 한국광복군 제1지대는 김원봉 휘하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구성되었고,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제2지대는 이범석 장군, 제3지대는 노복선 장군이 이끌었다”고 했다.

그는 “자꾸 민족주의, 좌파·우파로 나누는데 좌‧우 논리로 보지 말고, 조국독립을 위해 한민족이 하나 되었던 순간들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 박사는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이 밀려와 당시 지식인 중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수용하면서 이념을 달리했지만, 1927년 결성된 ‘신간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해서 만든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어 그는 1919년 상해, 블라디보스톡, 한성 등에 각기 세워진 임시정부가 통합한 일, 1923년 임시정부의 분열위기 때 상해파, 북경파로 나뉘었으나 일송 김동삼 선생의 각고의 노력 속에 분열을 막은 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919년 3.1운동 이전에도 우리 민족이 남녀노소, 신분을 떠나 하나가 되었던 순간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다. 일제에 진 나라빚 1,300만 원을 갚겠다고 담배를 끊고, 패물을 기탁했다. 당시 기생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제국주의 수탈의 첫 걸음이 바로 경제침략이었기 때문이다.”

이동언 박사는 기존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틀을 벗고 “독립운동사를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연구하고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라고 소신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