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듬 해인 1942년 임오년에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2개의 큰 사건이 있었다. 조선어학회사건과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조선어학회사건은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들이 기차 안에서 우리 말로 대화하는 것을 경찰이 트집 잡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교육한 교사 정태진을 체포한 데서 시작되었다. 1942년 10월 일제는 정태진이 관여하던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을 꾀했다고 하여 ‘조선어큰사전’을 준비 중이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 33인을 체포해 내란죄로 몰았다.

1908년 8월 31일 조선어학회가 창립총회를 연 곳(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 세워진 기념비. 창립당시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에서 1911년 배달말글몸음, 1913년 한글모, 1921년 조선어연구회 ,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1949년 이래 한글학회가 되었다. [사진 강나리 기자]
1908년 8월 31일 조선어학회가 창립총회를 연 곳(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 세워진 기념비. 창립당시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에서 1911년 배달말글몸음, 1913년 한글모, 1921년 조선어연구회 ,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1949년 이래 한글학회가 되었다. [사진 강나리 기자]

그러나 조선어학회 사건의 결정적인 계기는 다른 것이었다. 조선어학회 이사장이던 이극로의 책상에서 나온 대종교의 3세 교주 윤세복이 만주에서 《단군성가檀君聖歌》라는 가사를 보내 이극로에게 작곡을 의뢰한 편지였다.

일제는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널리 펴는 말’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조작했다. 제목을 ‘조선독립선언서’로 바꾸었고, 내용 마지막 부분인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이 도우신다’를 ‘봉기하자 폭동하자! 한배검이 도우신다’로 날조해 대종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빌미로 삼았다.

그해 11월 19일 만주와 국내에서 25명의 대종교 간부를 체포했고, 일제의 고문과 악형으로 1943년 5월부터 1944년 1월 사이에 10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을 ‘임오교변’이라고 하고, 홍암 나철 대종사의 두 아들인 나정련, 나정문, 백산 안희제 등 돌아가신 열 분을 ‘임오십현(壬午十賢)’ 또는 ‘순교십현(殉敎十賢)’이라고 한다.

40여 년간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이동언 박사(전 독립기념관 연구위원)는 단군을 독립운동의 구심으로 삼은 대종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진 강나리 기자]
40여 년간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이동언 박사(전 독립기념관 연구위원)는 임오교변을 비롯해 단군을 독립운동의 구심으로 삼은 대종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진 강나리 기자]

당시 일제가 임오교변을 일으킨 것은 대종교의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세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에 큰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동언 박사(전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대일항쟁기) 만주지역 한인 무장투쟁은 대종교 세력이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요인들도 다수가 대종교인이었고, 홍암 나철 대종사를 따랐다”라며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기념비적인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전투를 손꼽았다.

“청산리 전투는 총 8개 독립군 단체가 연합으로 싸웠는데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이 많이 알려졌다. 그런데 이를 이끈 지휘부인 총재가 백포 서일이고, 부총재가 현천묵이다. 대종교 동도본사 책임자인 서일 선생은 전쟁 중에도 염주를 걸고 수행을 했는데 북로군정서 독립군 병사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선생에 의해 시작되었다. 구한말 일본의 침략이 거세지자 나철 선생은 관직을 사임하고 비밀단체 ‘유신회’를 조직하고, 일본 내 이토 히로부미와 정치적 대립 관계인 인사들을 설득하며 대일 외교항쟁을 전개했고, 을사오적을 처단에 나서는 등 다양한 구국 활동을 전개했다.

현재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는 대종교 총본사에서는 홍암 나철 대종사를 비롯해 김교헌 종사, 윤세복 종사, 백포 서일 선생을 기리고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현재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는 대종교 총본사에서는 홍암 나철 대종사를 비롯해 김교헌 종사, 윤세복 종사, 백포 서일 선생을 기리고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홍암 나철 대종사의 대종교 중광기념시. [사진 강나리 기자]
홍암 나철 대종사의 대종교 중광기념시. [사진 강나리 기자]

그러나 국운이 점점 쇠퇴하자 홍암 나철은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민족정신의 부활에 주목했다.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비록 망해도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

이동언 박사는 “우리에게는 원래 단군을 모시는 고유사상이 있었다. 홍암 나철은 몽골침입으로 고려 원종 이후 700년 간 맥이 끊긴 국조 단군을 정점으로 하는 ‘단군교’를 계승해 중광하고, 이를 1910년 ‘대종교’라고 개명해 정신적인 각성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주권을 상실한 암울한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라고 했다.

경술국치 후 1911년 만주로 진출한 대종교는 민족학교를 설립해 신채호, 박은식 등과 함께 민족교육을 통해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고취했다. 당시 대종교 교도수는 30만여 명에 달했다. 이 박사는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 포교가 불가능해지자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파호로 대종교 총본사를 옮겨 갔는데 이곳이 바로 청산리대첩이 일어난 지역이다. 이곳에서 이주한 한인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했다.”라고 했다.

이후 일제가 중국 동북군벌정권과 결탁해 더욱 탄압하자 대종교총본사는 만주 각지를 전전했는데 1934년에는 발해의 옛 수도인 영안현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이전했다. 이곳에 백산 안희제 선생이 국외독립운동기지로서 발해농장을 개척해 국내에서 농민을 이주·정착시켰고, 학교를 세워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일제는 이를 주목하여 임오교변을 일으킨 것이다.

임오교변으로 수감된 대종교 간부들은 언어를 일체 사용하지 못하고 수족거동의 자유도 없었고 맹수 목축의 취급보다 못한 극심한 학대를 겪었다. 70세가 넘은 권영준 선생이 일주일간 벽에 세워져 비틀거리면 곤봉으로 밤새 난타를 당했다. 임오교변으로 순국한 10명은 권상익, 이정, 안희제, 나정련, 김서종, 강철구, 오근태, 나정문, 이창언, 이재유 등이다.

이동언 박사는 “대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임시정부에서 3.1절 기념식을 할 때도 단군 영정을 걸어놓고 진행했고, 이동휘 선생 등 기독교 신자들도 민족의 구심으로서 이를 따랐다”라고 했다. 시인 윤동주를 배출한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의 기독교 학교인 명동학교에서도 교실에 단군초상을 걸고 예배당에도 십자가와 단군기를 같이 놓고 예배를 했다고 한다.

올해로 80주년을 맞은 조선어학회 사건과 임오교변, 두 사건은 일제가 한국인의 민족정신 핵심인 언어와 정신을 탄압한 사건이다.

예관 신규식 선생(왼쪽)과 백산 안희제 선생. [자료 독립기념관]
예관 신규식 선생(왼쪽)과 백산 안희제 선생. [자료 독립기념관]
1921년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에 참석한 예관 신규식 선생 [자료 독립기념관]
1921년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에 참석한 예관 신규식 선생 [자료 독립기념관]

한편, 이동언 박사는 조선어학회 사건과 임오교변 이야기 끝에 “이 시대에 제대로 조명받아야 할 독립운동가로 예관 신규식 선생과 백산 안희제 선생이 있다. 올해 순국 100주기를 맞은 신규식 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상해로 망명해 해외에 흩어진 독립운동가를 규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의 산파 역할을 했다. 또, 백산 안희제 선생은 언론투쟁뿐 아니라 국내에서 임시정부로 가는 독립운동자금의 60%를 조달하고 전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발해농장을 세워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가 임오교변으로 검거되어 1943년 출감 다음날인 8월 3일 순국했다”라며 두 독립운동가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끝으로 이 박사는 독립운동사 및 우리 역사 연구의 위기를 지적했다. 그는 “현재 각 대학에서 독립운동사 강의가 사라지고 있고 지방대는 사학과가 폐지되어 연구자들이 감소하고 있다. 오히려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의 한국학연구소에서 더욱 활발하게 자료 수집과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러다가 외국 교수가 ‘한국 역사가 이것이다’라고 가르칠 판”이라며 “인문학, 그중에서도 역사 교육이 이렇게 망가지면 다시 회복시키기가 굉장히 어렵다”라고 매우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