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목가적인 ‘청포도’를 비롯해 민족의 의지를 노래한 ‘광야’ 등을 짓고 끝까지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시인 이육사의 친필 편지 및 엽서가 11일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등록 문화재 동록이 예고되었다.

등록 예고된 ‘이육사 친필 편지 및 엽서’에는 1930년대 당시 이육사의 근황을 비롯해 그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시인 이육사가 친척인 이상하에게 보낸 편지. (왼쪽) 한문편지 뒷면 (오른쪽) 한문편지 앞면. [사진 문화재청]
시인 이육사가 친척인 이상하에게 보낸 편지. (왼쪽) 한문편지 뒷면 (오른쪽) 한문편지 앞면. [사진 문화재청]

한문으로 작성한 편지는 친척인 이상하에게 보낸 것으로, 중외일보 대구지국 근무 시절 그가 겪은 생활 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일상적인 안부와 생활고에 대한 걱정, 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편지에는 1930년 6월 6일 소인이 찍혀있으며, 발신인에 '이활'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친필엽서는 친구인 시인 신석초(신응식)와 친척인 이원봉에게 보낸 것으로, 신석초와의 우정과 고향을 자주 찾지 못하는 아쉬움, 친척간의 정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친족인 이원봉에게 보내는 엽서는 1931년 11월 10일 소인이 찍혀 있고 발신인은 이활이며, 친구 신석초에게 보내는 엽서는 1936년 7월 30일 소인이 찍혀있고, 스스로 지은 호 육사로 발신인이 기재되어 있다.

이육사가 친척인 이원봉에게 보낸 우편엽서(1931년 11월 10일 소인)
이육사가 친구인 시인 신석초(신응식)에게 보낸 우편엽서. (1936년 7월 30일 소인). [사진 문화재청]
이육사가 친구인 시인 신석초(신응식)에게 보낸 우편엽서. (1936년 7월 30일 소인). [사진 문화재청]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는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류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의 호 육사는 당시 수인번호 264를 따서 지었다.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을 발표하며 문학활동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한 이육사는 체포되어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문화재청은 ‘이육사 친필 편지 및 엽서’와 함께 1921년 독립운동과 사회계몽 활동이 이루어진 ‘서울 구 천도교 중앙총부 본관’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 했다. 1969년 기존 소재지에서 일대의 도시개발사업으로 인해 철거 위기를 겪었으나 천도교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천도교 봉황각 옆으로 이전했다.

서울 구 천도교중앙총부 본관. [사진 문화재청]
서울 구 천도교중앙총부 본관. [사진 문화재청]

또한, 문화재청은 11일 ‘일제강점기 이충무공 묘소 보존과 현충사 중건 민족성금 편지 및 자료’를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했다. 1931년 충남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 묘소와 위토가 경매로 팔릴 위기에 처했을 때, 국내와 해외동포로부터 민족 성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편지와 기록들이다. 1932년 3월까지 1년여간 국내외2만여 명과 400여 단체가 동참해 1만 6천 원의 성금을 모았다.

이충무공 유적 보전 성금 대장. [사진 문화재청]
이충무공 유적 보전 성금 대장. [사진 문화재청]
경매에 팔릴 위기에 처한 충무공 이순신 묘소와 위토를 보전하기 위한 민족성금 모금에 참여한 황영소, 황영희 남매의 편지. [사진 문화재청]
경매에 팔릴 위기에 처한 충무공 이순신 묘소와 위토를 보전하기 위한 민족성금 모금에 참여한 황영소, 황영희 남매의 편지. [사진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