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 컷  [사진 쇼박스(Show Box)]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 컷 [사진 쇼박스(Show Box)]

2019년 8월 독립군의 마음처럼 치열하게 뜨거운 여름 날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원신연 감독, 유해진, 류준열, 조우진이 이름 모를 독립군으로 돌아온 영화이다. 원신연 감독은 알려진 영웅이 아닌 이름 모를 독립군 캐릭터의 친근한 이미지를 생각해서 배역을 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배역을 맡은 배우가 유해진, 류준열, 조우진이었다. 그들을 통해 100여 년 전 봉오동 죽음의 골짜기를 누볐던 독립군을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들의 노력으로 승리의 역사, 봉오동 전투를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대일항쟁의 역사에서 ‘봉오동 전투’ 이전에는 수난의 역사가 지배적이었다면 그 이후부터 승리의 역사가 시작된다. 승리 역사의 중심에는 홍범도 장군과 대한독립군이 있다.

영화를 이끌었던 두 인물, 황해철과 이장하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요 등장인물 중 황해철(유해진 역)은 홍범도 장군의 젊은 시절을 모티브로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그는 총보다 칼을 잘 쓰는 인물로 적을 향해 대도의 칼날을 바짝 세워 맹렬히 돌진할 때는 ‘날으는 홍범도’ 같았다. 또한 해학적이면서도 의리가 넘치고 충성스러운 독립군이며, 자신의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동생 같은 이장하와 독립군 동료들의 목숨은 끔찍이 아끼는 큰형 노릇하는 인물이다.

대한독립군 분대장 이장하(류준열 역)는 잘 훈련된 독립군 캐릭터이며, 독립군 ‘이화일’에게서 모티브를 가져 왔다고 한다. 이화일(1882~1945)은 을사늑약 체결 후 아버지와 함께 북간도로 이주, 대한독립군 분대장으로서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실존 인물이다. 이장하(류준열 역)는 임무를 위해 흔들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고, 그는 마침내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마지막 조선에서 일어난 모두의 싸움, 모두의 승리

1920년 마지막 조선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의 울분과 분노가 평범한 농부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들고 일어나게 했다. 심지어 애국심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마적들까지도 독립운동가로 변신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모두의 싸움이며, 모두의 승리인 것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 컷  [사진 쇼박스(Show Box)]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 컷 [사진 쇼박스(Show Box)]

영화 〈봉오동 전투〉는 3.ㆍ1항쟁 다음 해인 1920년 6월, 우리 독립군이 중국 봉오동 지역에서 최초로 일본 정예군을 격파한 승리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즉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다.

‘봉오동 전투’가 대일항쟁사에서 갖는 의미

이 봉오동 전투가 대일항쟁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또 우리가 왜 기억해야 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봉오동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기 직전에 우리 민족은 한반도 지배의 야욕을 품은 일본을 상대로 의병을 조직해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그것이다.

나라가 버린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의 무차별적인 학살과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일제의 학살과 탄압이 극에 달하자 의병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 일대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1910년 경술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우리 의병들은 이름을 독립군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그곳에서 그들은 낮에는 낫과 곡괭이를 들고 농사를 지었고, 밤에는 죽창과 총칼을 들고 군사훈련을 하였다. 그것이 고단했던 독립군의 삶이었다. 그렇게 약 10년 간 전의를 다지던 중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만세의 함성이 조선 팔도에 울려 퍼지게 되었다. 이 진격의 울림을 만주의 동포들도 똑똑히 듣게 되었다.

가난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최강 일본군과 맞서다

이렇게 어제의 농민이 오늘의 전사가 되어 일본과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만주 곳곳에서는 여러 독립군 부대가 조직돼 있었다. ‘군무도독부’, ‘국민회군’, ‘대한독립군’이 대표적이었다.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 컷  [사진 쇼박스(Show Box)]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 컷 [사진 쇼박스(Show Box)]

이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일본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동아시아 최강인 일본군이었다. 열악한 독립군들에겐 이길 수 없는 버거운 적들이었다. 그리고 독립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내부에 있었다. 바로 가난이었다. 척박하고 추운 만주벌판에서 어렵게 농사를 짓고 쌀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우리 가족들이 먹을 양식을 반으로 줄여가며 총과 폭탄을 구입했다.

문제는 가난만이 아니었다. 독립군들은 돈이 모일 때마다 외국산 무기들을 몰래 사들여 왔다. 이러다 보니 무기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다. 이것은 대규모 작전을 전개하기에 큰 어려움을 주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토록 어려웠던, 또는 열세였던 우리 독립군이 아시아 최강 일본 정예군과 당당히 맞섰던 것이다.

봉오동 전투의 서막이 된 삼둔자 전투

당시 일본군에게 우리 독립군은 오합지졸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비정규군이 자꾸만 강을 건너와서 일제 관공서를 파괴했으니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일본군이 복수의 칼을 뽑으며 강 건너 만주로 쳐들어왔다.

하지만 일본군은 발 빠른 우리 독립군을 놓치게 되고 이에 대한 화풀이로 인근에 있던 ‘삼둔자’라는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서 죄 없는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힘없는 아이, 노인, 여성, 심지어 임신부까지 있었다. 이때 우리 독립군이 나타나서 일본군을 한방에 섬멸해 버렸으니 이것이 바로 ‘봉오동 전투’의 서막이 된 ‘삼둔자 전투’이다. 복수하러 갔다가 된통 당한 일본군, 완전히 눈이 뒤집혀 버렸다.

일본군 월강추격대의 시작과 끝

그래서 ‘월강추격대’, 즉 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는 특수부대를 만들어서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 지역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렇듯 ‘삼둔자 전투’부터 ‘봉오동 전투’까지 긴박하고 치열했던 한일전이 바로 영화 <봉오동 전투>의 줄거리이다.

황해철 : “우리가 최종적으로 가야 될 봉오동이란 데는 이거 지원이 없다면 그대로 우리 무덤이 되겠다.”

우리 독립군의 정보망은 이미 월강추격대의 진격을 간파하고 있었다. 봉오동 주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뒤에 봉오동 골짜기 요소요소마다 매복하였다. 당시 홍범도 장군은 이화일(이장하 분) 분대장에게 일부 병력을 주고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에 깊숙한 곳까지 유인해 오라는 임무를 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화일 부대는 일본군과 싸우면서 지는 척, 밀리는 척, 힘 빠진 척 적절히 싸우면서 끌어들여야 하는데, 너무 잘 싸운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서 월강추격대 선봉부대를 섬멸해 버렸던 것이다. 만약 이때 일본군 후방부대가 겁을 먹고 회군했더라면 역사에 길이 남을 봉오동 전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고 후방부대는 중무장을 하고 대규모로 진군해 왔다. 이번에는 이화일 분대의 침착한 유인 작전으로 점점 일본군은 봉오동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침착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우리 독립군은 매복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 일본 정탐병이 왔을 때에도 숨죽이고 때를 기다렸다.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적들을 포위망으로 완전히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 컷  [사진 쇼박스(Show Box)]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 컷 [사진 쇼박스(Show Box)]

 

홍범도 장군의 선제 사격을 신호로 독립군들의 집중포화가 쏟아지고 월강추격대는 추풍낙엽처럼 고꾸라지게 된다. 세 시간 동안 저항하던 일본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때는 하늘마저 우리 편이었다. 급격한 기상 악화로 봉오동 골짜기는 폭우와 안개에 휩싸인다. 피아 식별이 어려웠던 일본군은 퇴각하다가 서로에게 방아쇠를 당기기도 했다. 봉오동에서의 숨 막히는 전투로 일본군은 전사 157명, 부상 300여 명 등 사상자 총 450여 명이 나오는 데 우리 측 사상자는 채 10명이 되지 않았다.

어제의 농사꾼, 오늘의 독립군이 되다

일본군의 무자비한 학살에 조선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마침내 일본군을 봉오동 상촌까지 유인하는 임무를 맡은 이장하 일행과 이진성이 모아온 독립 자금을 상해로 전달해야 되는 황해철, 마병구 일행이 만나 일본군을 소탕한다. 그러다가 독립군은 근처 동굴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다.

황해철 : “야, 개똥”

개똥이 : “네”

황해철 : “니가 봉오동에서 마지막으로 본 독립군 수가 어림잡아 얼마나 되갔든?”

개똥이 : “백 명 정도요.”

황해철 : “야, 백 명”

마병구 : “200은 족히 넘는다고 들었는디.”

개똥이 : “그게 매번 들쑥날쑥이라 정확한 수는 몰라요.”

황해철 : “우린 쪽바리 쪽수는 대충 알아도 전국의 독립군 수는 알 수가 없어. 왠 줄 아네?”

황해철 : “음, 생각해 보라. 왠 줄 아네?”

황해철 : “어제 농사짓던 인물이 오늘은 독립군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야.”

“나라 뺏긴 설움이 우릴 북받치게 만들고 잡아 일으켜서 괭이 던지고 소총 잡게

만들었다 이 말이야!“

독립군들의 대화를 통해 민초들의 독립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 첫 장면에서 황해철은 일본군의 피로 ‘대한독립만세’를 벽면에 적어 놓는다. 

분노한 해철은 태산처럼 무거운 항일대도를 새털처럼 가볍게 휘두르며 일본군을 제압한다. 그가 갖고 있는 항일대도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或重于泰山(혹중우태산)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或輕于鴻毛(혹경우홍모) 어떤 죽음은 새털처럼 가볍다.”

나라를 위한 죽음은 태산 같은 의미가 있으나 스스로 목숨을 아끼면 비겁해지기 마련이므로 때로는 대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문구가 아니겠는가.

봉오동 전투의 승리 요인

봉오동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기동력을 토대로 한 유격전이다. 둘째가 민간인들과의 협동이다. 셋째, 수적 열세를 지형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산세를 이용한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즉 지형을 아군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이다.

세 가지 승리 요인이 완전히 갖추어진 상태에서 유인작전이 성공하여 조롱박 구조의 골짜기 위에서 일본군을 완벽하게 포위하였고,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일본군이었다.

이것은 완벽한 작전의 승리였으며, 항일 무장투쟁으로 거둔 첫 승리였다. 독립군들이 주로 주둔하고 있던 곳이 만주나 연해주 지역의 첩첩산중 또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곳마저도 오래 동안 머물 수가 없었다. 일본군이 계속 추적해 왔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먼 거리를 이동해야만 했던 독립군들, 그들의 삶은 고단했지만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들이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자손들은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지 않게 하겠다는 꿈, 그 꿈이 있었기 때문에 고국의 주변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꿈 하나로 님겨진 그들의 발자취, 그 발자취를 정성스럽게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간절함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봉오동 골짜기에서 울려 퍼진 승전보는 청산리를 거쳐 마침내 광복으로 이어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다. 산 정상에 올라 장하 누이와 열사들의 넋을 기리는 홍범도 장군과 그것을 바라보는 독립군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독립군의 다음 전투를 홍범도 장군이 말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홍범도 : “청산리”

이렇듯 봉오동의 승전보는 청산리대첩으로 그리고 마침내 광복으로 이어졌다. 독립군의 위대한 승리, 대일승전의 그 서막을 열었던 ‘봉오동 전투’의 살아있는 이야기, 영화 <봉오동 전투>였다. 영화는 이제 대일항쟁역사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일항쟁의 역사가 외면하고 싶은 피해의 역사가 아니라 꼭 기억해야 될 빛나는 저항의 역사라는 것이다.

봉오동 전투에 참전했던 독립군의 메시지

일반 농민 출신의 독립군이 일본 정예부대를 격파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어려운 일을 독립군이 해냈던 것이다. 독립군들은 출신지역도, 계층도, 활동 배경도 다 달랐다. 하지만 이들은 눈앞의 이익, 진영 논리, 기득권 등 이런 사사로운 것 따윈 일단 접어두고 각자의 눈과 손과 발이 되어주니 실로 엄청난 시너지를 내게 된 것이다.

이 단결력이야말로 봉오동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우리 독립군의 저력이었다. 100년 전 이 땅을 지켰던 선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대립과 반목과 갈등의 벽을 넘어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손을 잡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그 어떤 어려움도 함께 딛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