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의 두 주인공 박열(이제훈 분)과 카네코 후미코(최희서 분). 사진 영화 스틸 컷 네이버 포토 갈무리.
영화 '박열'의 두 주인공 박열(이제훈 분)과 카네코 후미코(최희서 분). 사진 영화 스틸 컷 네이버 포토 갈무리.

2017년 6월 개봉한 영화 ‘박열’은 이준익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이제훈과 최희서가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대일항쟁기 때 일본에서 활동한 무정부주의자, 독립운동가인 박열과 그의 동지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주연 배우인 이제훈의 변신, 그리고 최희서 라는 배우의 발견이 두드러진 점이다.

1923년 일본 도쿄 거리를 한 남자가 땀범벅이 된 채 달리고 있는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도쿄에서 인력거꾼으로 일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박열’이다.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박열은 항일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였다. 그리고 박열의 시, ‘犬ころ(개새끼)’ 를 읽고 있는 여자의 이름은 ‘가네코 후미코’ 이다. 그녀 역시 박열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 이다. 후미코는 처음 본 박열에게 동거를 제안한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영화 박열. 이미지 플러스엠 유튜브
영화 박열. 이미지 플러스엠 유튜브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조선인을 이르는 말이었다. 대표적인 불령선인, 박열은 저항하기 위하여 일본 내 독립운동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박열은 후미코와 불령사 활동을 함께 했지만 후미코 몰래 폭탄 투척 계획을 세웠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후미코는 연인인 동시에 동지이길 원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폭탄 이야기를 하지 않은 박열에게 화가 나서 따귀를 때리기도 하였다.

그런 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데 갑자기 굉음과 함께 집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관동대지진이었다. 지진으로 인해 일본 내각은 비상소집으로 모이게 되는데, 사망자 10만 명 이상, 이재민 20만 명 이상, 백억엔 이상의 피해액, 지진으로 인해 피해로 일본의 관동지방은 지옥으로 변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게 되고 거의 폭동 직전인 상황이었다. 일본 내각은 들끓는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의 주장대로 지진피해로 생긴 대중들의 분노를 조선인으로 돌리고자 한다.

결국 계엄령이 선포되고, 조선인에 대한 출처 없는 괴소문 또한 일본 내 깊숙하게 퍼지게 되었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에 대한 경계를 장려하자 우후죽순 생긴 일본 자경단들은 조선인들을 향한 무차별 학살이 시작된다.

한편 조선인 학살 사태의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고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대규모 학살의 명분을 찾아야만 했던 미즈노는 갑자기 구속된 조선인의 명단을 확인하더니 불령사의 일원이었던 박열에게 주목한다. 마침 폭탄을 반입하려는 시도를 알게 된 미즈노는 다시 한번 왜곡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계략을 짠다.

미즈노 : “ 조선인에게는 영웅, 우리한테는 원수로 적당한 놈 ”

불령사의 일원이었던 김중한과 하쓰요의 자백으로 거짓 시나리오는 완성되었고, 미즈노는 곧장 사법대신을 찾아가 박열을 재판에 세우려고 한다. 그리고 다테마스 가이세이에게 사건을 맡기게 된다.

본격적인 재판을 위한 조사를 받게 된 박열은 죄인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후미코도 마찬가지였다. 조사 과정에서 재판의 의도를 눈치챈 박열은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리려고 한다.

박열 : “ 그들이 원하는 영웅이 돼 주어야지.”

이제 박열과 일본의 전대미문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폭탄 투척 대상을 묻자, 박열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하는데 바로 히로히토 일본 황태자였다. 박열의 대답으로 재판의 규모와 양상이 완전히 바뀐 상황, 대역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한편, 박열과 후미코를 제외한 불령선인들은 풀려나게 되고 박열을 구하기 위해 변호사를 구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박열은 기소를 중지시키려고 하는 변호사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대역죄는 사형뿐이라는 것이다. 박열은 이미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후세 다쓰지 : “조선인 최초로 대역죄의 주인공이 되겠군.”
박열 : “조선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대역이라면 얼마든지 대역 죄인이 되겠습니다.”

박열은 뚜렷한 증거도 정황도 없이, 사형이 명백한 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 건너온 기자 이석은 조선인 대학살 사건에 묻히는 게 안타깝고 불만이었다. 박열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다테마스에게 일침을 날린다.

박열 : “조선인에 대해 온정이 있는 척, 법관으로서 양심이 있는 척, 그거 자기기만이야. 그럴거면 침략을 말고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조선인을 죽이지 말았어야지.”

결국 박열은 재판을 거부하였고, 재판을 재개하는 조건으로 후미코와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요구를 한다. 조선에 계시는 자신의 어머님께 후미코를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재판을 위한 마지막 조사가 끝났고 대역죄에 해당함으로 대법원으로 넘어간다고 말하자 박열은 다테마스에게 한마디 한다.

박열 : “수고했네.”

박열을 돕기 위한 사람들이 모이고, 박열은 재판에 앞서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한다.

첫째, 재판관은 일본의 천황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나는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법정에 서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재판관이 법복을 입고 법정에 나온 이상 나도 법정에서 조선의 예복을 입게 할 것, 둘째,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강도 행위를 규탄하기 위하여 법정에 서는 것이므로 나의 이런 취지를 알리는 선언문을 낭독하게 할 것, 셋째, 나는 조선말을 쓰겠으니 통역관을 세울 것, 넷째, 내가 앉을 자리의 높이를 재판관의 자리와 같게 할 것, 이것들은 도저히 죄인의 요구사항으로 볼 수 없는 당당한 요구사항들이었다.

박열은 법정에서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서는 것이라며 조선의 관복을 입었다. 사진 영화스틸컷 네이버 포토 갈무리.
박열은 법정에서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서는 것이라며 조선의 관복을 입었다. 사진 영화스틸컷 네이버 포토 갈무리.

박열의 판결이 꼭 필요한 일본 내각은 심지어 조율을 부탁한다. 그래서 박열은 조선말로 하는 조건을 철회하게 되었고, 추가로 사법부의 체면을 살려 달라는 요구에 재판장과 동등한 높이의 좌석도 철회한다. 그 대신 예복은 조선의 관복으로 구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후미코는 “ 나도 조선의 치마저고리를 입을게. ” 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박열은 후미코와의 혼인신고서를 부탁한다. 그 이유는 바로 두 사람의 재판 결과는 당연히 사형이기 때문이었다. 가족에게 버림받았던 후미코, 시신을 수습해 줄 사람이 없었다. 박열 가족이 후미코의 시신까지 수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후미코가 그래서? 라고 묻자,

박열 : “같이 묻힐거야. 내 고향 조선 땅에” 라고 답한다.

1926년 2월 26일, 마침내 찾아온 1차 공판, 후미코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입장하였고, 그리고 뒤를 이어 박열은 화려한 예복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엄숙할 법정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화려한 예복의 분위기는 마치 혼례를 올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법정에 판사들이 입장하자 박열은 말한다.

박열 : “기죽지마”
후미코 : “기죽기는 일본에서 가장 버릇없는 피고인이 될거야.”

재판이 시작되고 판사가 이름을 묻자, 박열은 조선말로 박열이라고 대답한다.

박열 : “나는 박열이오.”
판사 : “그것은 조선말이 아닌가?”
박열 : “그렇다.”

이어서 후미코에게 이름을 묻자 후미코는 조선말로 답한다.

후미코 : “나는 박문자다.”

두 사람의 불량한 태도에 법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재판부는 일반 방청을 금지시키고 모두 쫓아버린다. 이어서 박열은 범행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열 : “천황의 신성함을 강요하여 국가가 유지되고 있는 일본에서 그 허구성이 일본 민중에 의해 밝혀지면 천황제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 민중은 그런 깨달음도 의지도 없다. 그 신성함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 겨우 빠져 나왔지만 곧 멸망의 시간이 올 것이다.”

이어 후미코가 범행동기에 대해 말한다.

후미코 : “천황제 사상은 권력이 이익을 탐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형용사로 포장한 것이다. 따라서 이를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은 특권계급의 노예가 되는 것임을 경고한다.”

박열은 며칠이 지난 후 2차 공판에서 조선인이 받았던 고통을 이야기하였다.

박열 : “일본 정부는 조선인의 혀를 자르고 전기로 지지고 여인네의 음부에 쇠꼬챙이를 꽂았다. 3.1 만세운동에 대하여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얼마 전 간토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기억한다. 그리고 끔찍한 일들이 바로 일본 내에서도 일어났다. 죽창과 일본도로 찌른 것은 기본이요, 양손을 묶어 강 속에 던지고 불 속에 산 채로 집어 던지고, 오토바이에 몸을 묶어 죽을 때까지 달렸다. 3.1 만세운동처럼 조선인 대학살로 묻으려 한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묻으려고 발악할수록 드러나는 것이 자연의 순리요, 역사의 흐름이다. 너희들 스스로 문명국이라 하지 않는가. 국제사회의 조사에 성실히 임하고, 증인들의 증언을 취합해 유골이 묻힌 곳을 발굴하라. 그런데도 드러나지 않는다면 내가 광인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드러나지 않는다면 내가 전향해서 천황의 열렬한 신봉자가 될 것이다. 너희 천황을 지키기 위하여 육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이유 없이 죽었다. 이의가 있는가?”

억울하게 그지없는 조선인 대학살사건, 일본은 은폐하려 하지만 박열은 국제사회의 조사를 받고 진상을 밝히라고 한 것이다. 박열은 일본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려 사형을 무릅썼는지 모른다.

1926.3.25. 최종 공판의 순간이 왔다. 하지만 결과는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법정 밖에서 기다리던 조선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절대 잊지 않겠다” 라고 외쳤다.

판사 :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박열 : “없네. 수고했네.”
판사 : “가네코 후미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후미코 :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박열과 같이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판사 :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피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박열은 자리를 떠나는 재판장에게 한마디 한다.

박열 : “내 육체는 자네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은 어찌할 수 있겠는가”

이때 가네코 후미코는 “만세”를 외쳤다.

일본 정부는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

영화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감옥에서 자살했지만 타살 의혹이 있는 것으로 처리했다.

미즈노 : “너를 왜 감형시킨 줄 알아? 산 채로 잊혀지게 만드는 거지. 오래 오래 살아서”
박열 : “그래, 전부 치밀하게 추궁해 주겠다.”

이렇게 영화는 끝나지만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석방되었다. 박열은 광복 후 일본에 있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를 발굴하여 서울효창공원에 안장토록 하였다. 198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불꽃 같은 삶을 담은 영화 <박열>은 거침없이 저항하며 불꽃같이 타올랐던 가장 불량한 청춘을 완성하였다.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박열>은 1923년을 살아가던 젊은이들의 일상에 주목한 영화다. 당시 대일항쟁기 때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은 대부분 20대 초, 중반의 젊은이들이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도 마찬가지다. 암울했던 시기, ‘박열’과 ‘후미코’는 부당한 권력이 장악한 세상에 대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었다. 영화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들만큼이나 뜨겁게 살아가고 있는지 반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