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강원특별자치도가 설치되었고 강원특별자치도에는 환동해본부가 있다. 환동해본부는 강릉, 동해, 속초, 삼척, 고성, 양양을 관할하는 일종의 출장소 같은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환동해지역은 동해를 둘러싼 지역으로 한반도, 만주, 연해주, 일본열도 등을 포함한 개념으로, 동해로 인해 이들 지역은 자연환경과 식생이 독특하게 분화되어왔다.

이러한 환동해지역에서 주목해야 할 종족집단이 바로 말갈이다. 한국 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환동해지역에서 말갈의 역사와 문화가 어떻게 요동쳐 왔는지 알 필요가 있다. 때로는 고구려인으로, 때로는 발해인으로, 그리고 여진인과 만주인을 거쳐 현재는 중국인과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다.

그동안 한국인들의 말갈 인식으로 보면 한민족과는 다른 이민족 오랑캐 집단으로 고구려시대에는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발해시대에는 발해의 지배를 받았다고 했다. 그런 말갈인들에게 고유한 문화가 존속할 수 있었을까? 답은 고구려문화도 아니고 발해문화도 아닌 고유한 말갈문화가 존재했다. 고구려와 발해 지배하에서도 말갈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말갈문화의 개념 정립부터 필요하다. 그동안 국내학계에서는 말갈문화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 일부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고구려나 발해문화와 비교해 공통점이나 차이점 등을 소개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발해의 기층문화인 말갈문화는 후에 금과 청제국을 세운 여진족이나 만주족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어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왔지만 사료 부족 등의 사유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사료 부족은 합당한 이유를 찾은 것에 불과하고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주변국들의 연구 동향은 다르다. 러시아와 중국 학계에서는 말갈문화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일본 학계에서는 발해문화가 오호츠크문화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말갈문화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이렇듯 국내학계에서 말갈문화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외된 주된 이유는 연구자들이 많이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우리 학계의 연구 경향이 발해문화가 고구려 계통임을 강조하는 반면에, 중국학계에서는 발해문화가 고구려 계통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갈문화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국내학계에서는 발해사를 온전하게 한국사로 편입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입장에 맞서서 발해의 말갈문화를 부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까지 학계에 보고된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후속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발해의 유적 및 유물에서 말갈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음을 부정할 수 없다.

기존 연구자들 중 일부는 말갈문화라는 개념을 실질적으로 말갈인들이 남긴 유적 및 유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상층부, 즉 지배계층과는 다른 이질적인 문화 계통을 의미하는 고고학적 문화의 통칭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고학적 관점으로 본 개념이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 발해라는 국가와 말갈이라는 종족집단 간의 민족 개념이 분명하게 고고학적 문화로 구분이 가능한 가에 대한 검증 없이 두 문화의 구분을 곧 민족의 분리로 개념 지어왔다. 이 또한 기존 말갈문화 연구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말갈문화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말갈문화의 개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가 최초 말갈문화 연구를 할 때 극동지역이라고 일컫는 아무르강 유역과 연해주지역을 중심으로 발굴한 결과를 토대로 말갈문화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고구려 또는 발해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덜 미쳤던 지역이기 때문에 말갈문화가 온전하게 보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갈 집단의 영역은 요서와 요동지역, 한반도 중, 북부지역, 송화강 유역(속말말갈)과 두만강 유역(백산말갈)까지 다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시ㆍ공간의 개념을 확대 적용하여 말갈문화의 개념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고구려 이전부터 말갈문화가 생성되어 발해를 거쳐 후대인 여진족까지 말갈문화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말갈문화는 발해문화 연구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말갈문화의 기원과 고구려 또는 발해문화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역사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관점에서도 그 관계를 확인할 수 있고, 또한 후대 역사인 여진족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해 봄으로써 동북아시아 문화에서 말갈문화의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선사시대 이래로 연해주와 연변 지역은 한국사의 일부였다. 극동(極東)이란 동쪽 끝을 말한다. 극동이란 표현 자체는 유럽 기준에서 동아시아를 이르는 표현이다. 영국이 끗발 날리던 시절 브리튼 섬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 지도를 그렸을 때 소아시아와 동유럽은 가까운 곳에 있으니 근동(近東),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서남아시아 쪽은 중간쯤 위치에 있으니 중동(中東), 그 외 지역들은 지도의 동쪽 끝에 있으니 극동(極東)이라 부른 것에서 기인한다. 서구 중심적 표현이란 것이 알려지면서 대체로 사용하지는 않으나 일상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러시아다. 다른 명칭으로는 원동(遠東)이 있다.

이러한 말갈문화의 대표적인 요소로서는 무덤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묻는 움무덤과 도기인 통형관을 들 수가 있는데, 중심지보다는 주로 변두리 지역에서 발견된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 범말갈 문화를 대표하는 지표 유물은 통형관이다. 흔히 말갈관으로 불리는 통형관은 석영 혹은 운모가 비짐(흙 따위의 재료들을 이겨서 어떠한 형태를 만드는 것)된 태토(도자기를 만드는 흙 입자로 질이라고도 한다)를 사용하여 손으로 제작하고 있다. 밑바닥이 없는 통형관은 말갈문화를 대표하는 기종이다.

북방지역의 고대문화인 말갈문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가 북방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는 대륙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것이 바로 사고의 전환이다.

발해는 이제 단순한 우리 고대사의 한 나라가 아니라 최근 역사분쟁의 과정에서 야기된 문화의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연해주와 연변에 발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지역은 동해를 공유하며 한반도 동해안과 선사시대 이래로 매우 친밀했었다. 후기 구석기 시대 이래로 옥저와 발해로 이어지는 동안에 그들은 한국과 긴밀한 문화적 교류를 맺으며 독특한 삶을 영위해 왔다.

연해주와 연변을 포괄하는 간도지역은 발해의 옛땅인 동시에 19세기 말부터는 고려인이 정착하고 또 일제에 대항하여 대일항쟁을 한 거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 러시아, 북한으로 분리되고 변방지역으로 치부되면서 그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한국과 러시아의 공동 연구로 연해주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환동해지역을 따라서 중국과는 이질적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공유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환동해지역 간의 문화교류는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부분이다. 한반도의 고대문화가 중국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중국의 동북공정론에 대한 우리의 합리적인 대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연해주, 간도 지역과도 다양한 교류를 밝히고 우리 문화가 다양한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서 형성되었음을 밝히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대응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