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장 김창수' 포스터. 사진 송승헌 페이스북.
영화 '대장 김창수' 포스터. 사진 송승헌 페이스북.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대일항쟁의 구심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 더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대장 김창수〉 다. 낯선 이름 같지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다. 바로 백범 김구 청년 시절 이름이 김창수다. 2017년 이원태 감독, 조진웅, 송승헌 주연의 영화 〈대장 김창수〉가 개봉되었다.

우선 김창수 역을 맡은 조진웅 배우는 감독이 3년 동안의 삼고초려 끝에 김창수 역을 맡게 된다. 배우 조진웅은 고집 세고 혈기 왕성했던 청년이 진정한 대장으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진정성 있게 담아냈다. 역사 속 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의지와 의식을 다잡으며 마치 홀린 것처럼 연기에 임했다는 그는 현장에서 ‘김창수’ 그 자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 영화 〈암살〉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속사포 역을 맡은 적이 있었던 그는 결국 2021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의 품으로 모시고 오는 역할을 맡게 되기도 한다.

영화는 1896년 황해도 치하포, 청년 김창수가 일본인을 죽이고 체포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재판장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았을 뿐이라고 소리치지만 결국 사형 선고를 받고 인천 감옥소에 수감된다. 친일파 감옥소장 강형식은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김창수를 갖은 고문으로 괴롭히고 죄수들마저 김창수에게 등을 돌린다. 하지만 그곳은 김창수에게만 지옥이 아니었다. 못 배우고, 못 가졌다는 이유로 재판조차 받지 못한 채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조선인들을 보며 김창수는 조금씩 현실에 눈을 뜨게 되고, 변화를 꿈꾸고자 한다. 천하고 평범한 청년이 대장 김창수로 거듭나기까지 그의 모든 것을 바꿔놓은 625일의 이야기가 영화 〈대장 김창수〉의 주요 스토리다.

영화 '대장 김창수'의 한 장면. 사진 조진웅 페이스북.
영화 '대장 김창수'의 한 장면. 사진 조진웅 페이스북.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는 투지로 살아왔으나 외골수에 혈기만 넘치던 청년 ‘김창수’. 감옥이라는 가장 어둡고, 처절한 공간에서 그는 성장하고 변해가기 시작한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며 감옥 안에서도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던 청년은 자신보다 더 억울하고 힘이 없어 그저 고통을 당해내고 견뎌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감옥 안의 조선인들을 보며 해야 할 일을 점점 깨우치기 시작한다.

바깥 세상보다 더 참혹한 감옥살이를 견디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기 시작하는 ‘김창수’와 스스로 변하면 바꿀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점차 변모해가는 동료 죄수들의 모습은 우리의 삶을 우리의 힘으로 바꿔나가고 있는 현 세태와 맞물려 큰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김창수의 감옥 생활에서 멘토 역할을 했던 고진사와의 다음 대화 속에서 우리는 피는 꽃마다 다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김창수 : “지금 이까짓 글자 쪼가리가 눈에 들어옵니까?”

고진사 : “이 글자 쪼가리 몇 개를 몰라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고진사 : “예쁘게도 피었네. 이 들꽃은 무슨 죄를 지어서 감옥 안에 피었겠나?”

김창수 : “꽃이야 아무데나 피는 거고. 저 사람들이야 죄를 지었으니까 여기 왔겠죠.”

고진사 : “그럼 자네는? 여기 태반이 재판도 못 받고 갇혀 있어. 안에서 핀 꽃이나 밖에서 핀 꽃이나 모두 다 같은 꽃인 게야.”

이 대화를 통해 김창수가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름다운 나라를 꿈꾼 김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625일, 그의 모든 것은 역사가 되었다. 역사가 된 일기, ‘백범일지’를 통해 우리는 그 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 속 위인의 가장 빛나던 시절이 아닌, 위대한 리더로 거듭나기 위해 알을 깨고 나가는 ‘김창수’의 출발점에서의 모습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백범 김구 비긴즈(탄생기)’ 라고도 부른다.

영화 '대장 김창수'의 한 장면. 사진 조진웅 페이스북.
영화 '대장 김창수'의 한 장면. 사진 조진웅 페이스북.

며칠 전 한양 궁궐과 인천 간에 개통되었던 전화를 통해 고종황제는 청년 김창수의 사형집행을 멈추게 하였다. 극적으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석방될 날은 기약할 수 없었다. 이에 김창수는 왜놈의 원수를 갚으려면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년 3월 9일 밤 감옥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창수’ 라는 본명을 계속 사용할 수 없었던 선생은 이름을 거북 구(龜)자 한 글자로 쓰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에게 잘 알고 있는 ‘김구’라는 이름을 쓴다. 이렇듯 김구 선생은 평생을 걸쳐 아홉 개의 이름을 갖게 되는데, 우선 어릴 적 이름은 김창암, 동학에 입교하면서 김창수, 감옥을 탈옥하면서 김두호, 마곡사에 피신해 있으면서 받은 법명이 원종, 승려에서 환속하면서 김두래, 강화도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김구(金龜), 신민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면서 비로소 백범 김구(金九)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고, 상하이 윤봉길 의거 이후 장진구 또는 장진이라는 이름을 쓰시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 되었을 때 다시 백범 김구(金九)라는 이름을 쓴 것이 선생의 최종 이름이 되었다.

또한 1910년 경술년에 국치를 겪게 되는데, 선생은 서울 양기탁 집에서 열린 신민회 모임에 참석하여 황해도 지역대표에 선임되었다. 1911년 1월 5일, 일제는 신민회의 존재를 알아채고 회원들을 잡아들였다. 이에 따라 선생도 붙잡혀 서울에서 징역 2년 형으로 갇혀 지내는 동안, 또 다시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이 더해져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가출옥이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딴 것이다.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도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해야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선생의 의지가 여기에 담겼다.

또한 동학, 유학, 불교, 기독교 등으로 종교를 섭렵하였지만, 최고의 가치는 민족에 두고, 통합ㆍ통일 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대장 김창수, 아니 백범 김구 선생이다. 임시정부 시절 좌우합작을 실현하였고, 환국한 뒤에는 통일국가 수립 운동에 몸을 던지셨다. 이제 선생의 뜻을 따라 민족과 인류를 넘어 지구에 가치를 두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하나 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공생운동’을 펼칠 때이다. 홍익인간의 21세기 버전은 ‘공생휴먼’이다. 공생이 되려면 우선 광명이 되어야 한다. 하늘이 특정인 또는 특정 집단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은 모두의 하늘이며 그 하늘을 통해 전해지는 빛은 만물을 성장시키는 에너지원이고 모두가 함께 누려야 되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청년 시절의 이름인 김창수, 청년 김창수로부터 우리는 대일항쟁의 길이 어떻게 시작이 되어서 결국 대일항쟁의 구심이자 독립운동의 상징이 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영화 〈대장 김창수〉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는 치하포 사건에 대한 논란을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했고 진부한 연출과 시나리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 전개, 일부 출연 배우의 연기 논란, 김창수의 감옥 생활과 탈옥과정은 영화 〈쇼생크 탈출〉과 많이 닮아 있다는 비평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란을 뛰어넘은 한 가지를 꼽는다면 죽음의 문턱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김창수가 민족과 국가에 헌신하면서 결국 대일항쟁의 구심이자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 '대장 김창수'의 한 장면. 사진 조진웅 페이스북.
영화 '대장 김창수'의 한 장면. 사진 조진웅 페이스북.

사형집행이 극적으로 멈춰졌을 때, 청년 김창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창수 : “김창수는 오늘 죽었습니다.”

김구 선생의 외손자 : “할아버지께서 사형집행 직전에 살아난 경험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할 결심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한성과 인천을 잇는 철로 개설(경인선)에 인천 감옥소에 수감 중인 김창수와 조선인 죄수들이 대거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는데, 무리한 공사 일정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조선인들이 대거 사고사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김창수를 중심으로 조선인 죄수들이 항거하게 된다.

하지만 나약한 나라를 등진 강형식의 눈에는 대장 김창수와 죄수들의 투쟁이 그저 한심한 몸부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형벌방에 있는 김창수에게 말한다.

강형식 : "그런다고 안 바뀐다. 이 나라가 그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김창수 : "할 수 있어서 하는 게 아니다. 해야 해서 하는 거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건져 올린 독립운동가들의 삶, 그러기에 더 위대하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다. 국가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기고 그것에 비분강개( 의롭지 못한 일이나 잘못되어 가는 세태가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쳐 오르고 적개심이 생기는 것을 말함 )했던 조선의 청년들, 그중 한 명이 ‘김창수’였다. 대일항쟁기가 딱 비분강개할 시기였다. 사람만이 희망을 가질 수 있고 그 희망을 마침내 실현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이다. 한국인들이 겪었던 고통, 슬픔 등이 거룩한 분노가 되어 대일항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