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름없는 별들'의 한 장면. 사진 네이버 영화 갈무리.
영화 '이름없는 별들'의 한 장면. 사진 네이버 영화 갈무리.

영화 <이름 없는 별들>은 김강윤 감독, 황해남(상훈 역), 조미령(영애 역), 최남현(송운인 역) 주연의 1959년 영화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30년이 흐른 시점에 영화로 재탄생하였고, 당시를 기억하는 생존 인물이 많은 데다가 광주시민과 학생 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당시 상황을 현실감 있게 그린 영화이다. 영화는 독립운동가였던 강상훈의 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상훈 아버지 : 원수를 갚을 날이 오고야 말 것이오, 우리가 못하면 자식들이 할 것이고 자식들이 못하면 손자들이 또 나설 것 아니겠소.  

상훈 어머니 : 나라를 찾아야죠. 우리가 받고 있는 설움을 자식들에게까지 물려 주고 싶지 않아요. 

상훈 아버지 : 고마운 말이오.

그리고 주인공 강상훈을 비롯한 학생항일비밀결사단체인 ‘성진회’가 나온다. 그들은 ‘쌍길춘’ 이라는 중국 왕서방 호떡집에 모여 일본 고등계 형사인 최영식의 여동생인 야마도 여학교 최영애의 가입을 승인해 준다. 친구인 광주여고 대표 조인옥과 강상훈의 적극 추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입한 최영애에게 조직을 소개한다.

조익훈 : 상훈 동지, 우리 성진회의 역사와 정신에 대해 간단히 말씀하시죠.

강상훈 : 우리 성진회는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고 삼일정신의 맥박을 줄기차게 계승 발전시키자는 취지 아래 1925년 8월 26일 조동윤 동지를 위시하여 여러 선배님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민족자결주의 이념 아래 빼앗긴 조국의 독립과 짓밟힌 민족의 자유를 탈환하여 외제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결사 반대하자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강상훈의 생일 잔치에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애쓰는 송운인 한문 선생님이 초대받아 참석하였다.

최영애 : 선생님! 선생님은 젊으셨을 때 어떤 꿈을 꾸셨어요?

송운인 : 내 젊은 시절의 꿈이라, 하하, 우리들의 꿈은 컸었지. 그때 청년들은 모이면 의례히 민족을 말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세계를 논하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내 청춘은 끝났다. 숨도 크게 못 쉬고 말도 크게 못 하는 이런 세상을 너희들에게만 남겨 놓고....(한숨쉰다)

강상훈 : 선생님! 이 쇠사슬을 끊고 뛰쳐나가 땅을 고르며 하늘을 얼싸안을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광주에서 나주까지 가는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하고 노인에게 불손하게 대하는 등 도발했다. 조선 학생들은 분노하였지만 울분을 참을 수밖에 없다. 나주역에 내렸을 때 또다시 일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의 댕기를 잡아당기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것을 지켜보다 참을 수 없었던 조선 학생들과 충돌이 있었고 급기야는 패싸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오히려 조선 학생들만 체포하였다. 

일본 학생들이 조선 학생들에게 맞은 것이 분하다고 생각하고 다시 패싸움을 계획하고 비겁하게 무기를 들고 조선 학생들을 마구 때렸다. 이를 목격한 조선 학생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일본 학생들과 맞서 싸웠다. 송 선생은 싸움을 말리려고 갔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조선의 학생들은 성진회를 중심으로 한 광주지역 학생 대표들이 봉기하기로 한다. 거사일은 11월 3로 하기로 했다. 이날은 일본의 경축일 '명치절'이라 경계가 소홀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조직화를 위해 아지트인 쌍길춘에 다시 모이려고 하였으나 이를 알아차린 일본 고등계 형사 최영식이 일망타진하려고 잠복하고 있었다. 동지들에게 배신자로 오해받던 최영애는 동자들에게 이를 알리고자 아픈 몸을 이끌고 쌍길춘을 찾아간다. 강상훈을 체포하려는 오빠 최영식을 말리려다가 오빠 총에 맞고 쓰러진다.

이 틈을 타 강상훈은 몸을 피할 수가 있었고 결국 11월 3일, 광주 거리는 조선의 학생들로 가득 메우게 되었다. 그들은 고통받던 민족의 횃불이 되어 봉기하였다. 상훈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품인 태극기를 상훈에게 건네주고 상훈이 선봉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시위에 참가한 조선 학생들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파급되어 서울, 평양, 부산, 신의주, 함흥, 전주, 대구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피 뿜어 올린 항일투쟁의 봉화가 올랐고, 쇠사슬에 묶인 채 피 뿌려 쓰러진 이름 없는 별들이 삼일항쟁 이후에 가장 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인성을 상실한 교육의 현장 속에서 아무도 학생들의 행복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학생들이 제대로 현실을 직시하고 세상사에 관심 갖고, 세계와 소통하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고 했듯이 1920년대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학생의 본분이 공부에만 있지 않고 세상과 소통하는 사회적 공감 능력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