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 제2회 졸업기념사진. 사진 '일제강점기'(박도 저, 눈빛출판사).
1912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 제2회 졸업기념사진. 사진 '일제강점기'(박도 저, 눈빛출판사).

동북아역사재단이 지난 4월 27일 주최한 '일제강점기 교육정책의 연구 방향' 주제 학술회의에서 중등교육과 관련해 서울대학교 안홍선 교수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교육은 소학교육, 중학교육, 대학교육의 성장으로 순차적 점진적 교육 발전이 아니라 국가적 역량을 대학교육에 집중하면서 고도의 선발 교육이 요구되는 학력 경쟁 체제가 되었다. 일본이 고안한 중등교육제도는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었다”며 지금도 유사한 한국과 일본의 교육현장 파행의 원인을 밝혔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조속한 근대화를 목표로 순차적인 교육발전이 아닌 국가적 엘리트 선발을 목표로 한 교육체제로 학력경쟁이 격화되었다. 이 체제가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면서 교육적 파행이 발생했다. 자료 동북아역사재단.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조속한 근대화를 목표로 순차적인 교육발전이 아닌 국가적 엘리트 선발을 목표로 한 교육체제로 학력경쟁이 격화되었다. 이 체제가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면서 교육적 파행이 발생했다. 자료 동북아역사재단.

“일본인 학생에 비해 조선인 학생들에게 매우 차별적인 입시정책으로 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서는 ‘시험지옥’이라는 말이 널리 통용될 정도로 극심한 학력경쟁 문화가 나타났다. 학생들의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학교로서도 학생들의 진학 준비를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1920년대 이후로 고등보통학교는 사실상 상급학교 입학준비 기관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현재 입시과목 중 비중이 높은 국영수 위주의 교육, 국사 등 가치와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입시 비중이 낮은 과목에 대한 외면과 매우 닮은 형태였다.

안 교수는 “입시과목을 중심으로 파행적인 교육과정 운영, 1920년대를 경과하면서 교수방법에서도 기계적인 문제풀이 훈련에 초점을 둔 전형적인 입시준비 교육이 이루어졌다. 또 각종 시험 및 모의고사 등을 통해 학생들이 본인 성적의 위치를 가늠하게 해 보다 치열한 성적 경쟁을 유발하는 효과를 도모했다”며 “모든 교육활동이 사실상 입시준비에 맞춰져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입시위주 교육에 대해 비판하고 경계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은 형식상 학력차별이지만 실제 민족차별의 행태를 심화했다. (왼쪽) 1925년 민족별 국세납입액과 관립학교 학생수 (오른쪽) 1930년대 전반 관립전문학교의 민족별 입학경쟁률 현황. 자료 동북아역사재단.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은 형식상 학력차별이지만 실제 민족차별의 행태를 심화했다. (왼쪽) 1925년 민족별 국세납입액과 관립학교 학생수 (오른쪽) 1930년대 전반 관립전문학교의 민족별 입학경쟁률 현황. 자료 동북아역사재단.

일제강점기 중등교육 학교가 상급학교 입시 준비기관으로 교육 파행,
상급학교 합격자 배출이 학교와 지역의 명예로 인식

또한, 당시에도 고등보통학교들이 상급학교 합격자를 얼마나 배출하는가를 두고 학교 간 경쟁하면서 상급학교 진학은 개인적 성취를 넘어 학교의 명예가 걸린 문제, 지역 집단의 명예를 높이는 행위로 간주되면서 정당화되고 더욱 부추겨졌다.

한편, 여자고등보통학교(고등여학교)의 경우 식만당국의 정책으로부터 사실상 방치되었고, 여자의 중등학교 취학률은 1%에 미치지 못하는 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극히 소수의 교육받은 여성을 ‘신여성’, ‘모던걸’로 불렀는데 그들의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표현했다. 식민당국이 중등 단계 여자교육에서 지향하는 궁극적 교육 목적은 ‘현모양처’로서의 역할 수행이었으며 식민지시기 전반에 걸친 목표가 되었다.

근대 교육에서 여성은 소외되었고 채 1%가 되지 못하는 극소수 여성의 교육은 '현모양처'의 역할을 목적으로 했다. 1911년 이화학당 졸업생들. 사진 '일제강점기' (박도 저, 눈빛출판사)
근대 교육에서 여성은 소외되었고 채 1%가 되지 못하는 극소수 여성의 교육은 '현모양처'의 역할을 목적으로 했다. 1911년 이화학당 졸업생들. 사진 '일제강점기' (박도 저, 눈빛출판사)

또한, 안홍선 교수는 “실업학교의 경우 ‘독립 자영인’ 양성을 목표로 했으나, 실제로는 농업학교 졸업생 대부분 관청 직원이나 교원으로, 상업학교 졸업생은 금융기관이나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등 ‘봉급생활자’를 키우는 교육이 되고 말았다”라고 했다. 게다가 ‘노동화된 실습’교육의 문제로 인해 학생들이 집단적 반발을 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성 교육은 ‘현모양처’ 배출 목표, 실업학교는 ‘봉급생활자’ 양성

그는 “광복 후에도 중등교육과 고등교육(대학 이상)이 크게 팽창했지만, 오히려 중등단계 일반교육은 고등교육에 더욱 종속되어 대학진학을 위한 입시준비기관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며 “식민지 시기 형성된 교육 잔재가 매우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1917년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수업시간. 사진 '일제강점기' (박도 저, 눈빛출판사).
1917년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수업시간. 사진 '일제강점기' (박도 저, 눈빛출판사).

세 번째 일제강점기 고등교육 정책과 관련해 서울대학교 김태웅 교수는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고등교육 정책은 이를 제한하려는 것이다. 1910년 이후 관림전문학교 개설은 주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학생들의 진학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1920년대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략, 수탈정책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했고, 그러한 정책을 수행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기구였다”고 평가해 일제가 근대교육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허구였음을 밝혔다.

일제 식민교육의 민족적 차별은 졸업 후 취업 분야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왼쪽) 관립 전문학교 졸업생 취직자의 봉급현황 (오른쪽) 1930년 사립전문학교 졸업생 취직현황. 자료 동북아역사재단.
일제 식민교육의 민족적 차별은 졸업 후 취업 분야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왼쪽) 관립 전문학교 졸업생 취직자의 봉급현황 (오른쪽) 1930년 사립전문학교 졸업생 취직현황. 자료 동북아역사재단.

아울러, 사립전문학교는 총독부가 전혀 지원을 하지 않아 경영난과 학내분규에 시달려야 했다. 김태웅 교수는 일제 시기 경성제대(일본인 교수와 학생)를 정점으로 그 아래 관립전문학교, 사립전문학교라는 서열구조가 구축되었고, 민족별 정원 비율, 취직 문제 등 구조적 차별을 통해 형식상 학력 차별구조, 실제상 민족차별 구조를 심화시켰다고 분석했다.

해방 후 미군정청 학력주의에 입각해 구 조선총독부 조선인 관리 임용
→ 일제 잔재 청산 지연, 학력주의 신화 강화

그는 “일제로부터 해방 후 식민지 고등교육체제의 한축인 민족차별 서열구조는 종식되었으나 그 빈자리에 학력차별위계구조가 전면화해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며 “시험성적이 능력의 지표로 간주되는 시험능력주의가 정착했다”고 했다.

또한, 미군정의 지원, 자원읠 집중 배정으로 서울대학교와 유수의 사립대학이 정점을 차지하면서 학벌사회의 도래, 사교육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김태웅 교수는 “미군정청이 학력주의에 입각해 구 조선총독부 조선이 관리를 임용하면서 일제 잔재 청산은 지연되었고, 학력주의 신화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학력 엘리트들이 정국의 혼미와 전쟁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을 유지, 재생산하면서 한국 사회의 여러 분야를 주도했다”며 식민교육의 잔재가 한국 사회 깊숙이 영향력을 미쳤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