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수많은 다케시마란 이름의 섬이 있다. 미야기현과 아이치현, 야마구치현, 쿠마모토현, 카고시마현의 죽도竹島와 시가현의 다경도多景島까지도 ‘다케시마’라 부른다.

심지어 한‧일간 울릉도쟁계가 발생했던 17세기 말에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불렀고, 조선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한 러‧일전쟁 중 전략적 요충지로 독도를 주목하면서 다케시마라 칭하며 영유권 도발을 하고 있다.

독도 동도 정상에서 바라본 서도. 사진 외교부 독도누리집.
독도 동도 정상에서 바라본 서도. 사진 외교부 독도누리집.

지난 4월 11일 일본 정부는 외교청서를 통해 “역사적 사실에 비춰봐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과연 그럴까?

현재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하 강화조약)으로 독도 영유권을 보장받았고, 미국 국무부 딘 러스크 차관보의 서한(통칭 러스크 서한)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게재되었다.

그런데 국제법학계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지금 일본이 한국과 중국, 러시아와 독도(일본명 다케시마),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쿠릴열도를 두고 영토분쟁을 하게 된 원인으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손꼽는다.

독도의 한국영유권을 명확히 했던 연합국, 미소 냉전으로 영토문제 정치화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질 시기 전후 논의를 위해 만난 연합국의 방향성은 분명했다.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과 함께 일본이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영토의 반환을 의결했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는 일본 주권의 범위 즉, 영토 제한에 관해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일본의 항복 후 1946년 1월 29일 연합국 최고사령부(GHQ)는 SCAPIN 677호를 통해 일본영토의 범위를 규정했다. 이때 독도를 한국령으로 분명하게 명시했고, 도서의 12마일 이내 접근을 금지하여 독도의 지위를 더욱 명확히 했다. 1951년 4월 영국 외무성이 제작한 지도에도 독도는 한국령이다.

종전 후 처리를 위해 미국이 주축이 되어 일본과 48개국 사이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초기 초안(1차~5차)에 독도는 한국령으로 분명하게 명시되었으며, 1947년 초안에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지도까지 첨부되었다.

하지만 미소냉전이 격화되고 한반도 북쪽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 의해 축출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반공 조약의 성격이 강화되어 일본의 전쟁 책임, 영토할양, 배상금 등 징벌조약의 핵심 내용이 배제되었다.

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미국은 동북아지역 반공 전선의 방파제이자 동반자로 일본을 선택하는 대공산권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이로 인해 영토 문제가 본질을 잃고 정치화했고, 패전국으로서 징벌과 영토 반환을 각오했던 일본 정부는 유리해진 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51년 9월 8일 조인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독도 영유권을 포함한 동북아 영토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1951년 9월 8일 조인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독도 영유권을 포함한 동북아 영토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강화조약 6차 초안에서 독도는 한 차례 일본령으로 표기되었다가 7차 이후 최종적으로 조약에서 독도에 관한 명시가 사라졌다. 끝내 한일 양국의 영토로 특정되지 않은 채 1951년 9월 8일 조인되고 다음 해인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었다.

이를 두고 일본은 독도가 일본이 ‘포기하는 한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조약으로 일본령임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독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없으므로 SCAPIN 677호의 연장선 상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독도는 한국령이라고 한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6차 초안에 미 국무부 주일 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 관여

올해 2월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연구총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70년의 역사와 과제》를 통해 살펴보면, 1949년 12월 29일 6차 초안에서 미국의 독도에 대한 태도가 180도 달라진 데는 미국 국무부 주일 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Wiliam J. Sebald)가 관여했다.

시볼드는 1949년 11월 19일 미국 정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리앙쿠르암(독도를 지칭하던 서구의 명칭)을 … 일본에 속하는 것으로 특정해야 한다…안보적으로 고려할 때 이들 섬에 기상 및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것은 미국에도 이익이 결부된 문제”라했다.

친일성향 인사로 평가되는 시볼드의 주장은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제작해 미국에 제공한 ‘일본의 부속도서 제Ⅵ부: 태평양 소도서, 일본해 소도서’ 책자의 내용을 그대로 원용한 것이다. 일본 정부의 주장을 대변해 전한 것이며,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함대를 관측하고자 독도에 망루를 설치한 일본의 발상과 같다.

이에 관해 국제법학자 하라 키미에 캐나다 워털루대학교 교수는 시볼드의 의견서가 수용된 시점이 중국이 공산화된 시기인 점에 주목한다. 그는 “한반도가 공산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독도가 한국 영토가 아닌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분석했다. 또한, 7차 초안 이후 독도 명시를 삭제한 것과 관련해 키미에 교수는 “한반도의 공산정권과 일본의 접근을 막기 위해 고의로 영유권 분쟁의 여지를 만들어 두었다”고 파악했다.

일본 정부가 원용하는 ‘러스크 서한’과 미 국무부 델러스장관 전문의 충돌

한편, 미국의 태도 변화에 6.25 한국전쟁 중이던 대한민국은 양유찬 주미대사를 통해 한국령이던 독도를 한국령에 포함해 줄 것을 미 국무부에 요구했다. 강화조약 체결 직전이던 당시 미국 국무부 딘 러스크 차관보는 “1905년부터 독도는 일본 관할 하에 있었다”며 한국 요청을 거부했다.

주목할 점은 1951년 러스크 서한의 경우, 한국 정부에만 전달하고 일본 정부에는 전달하지 않았다. 반면, 이후 미국 국무부는 1953년 11월 19일자 덜레스 국무장관의 전문을 통해 “독도 문제에 대해 일본 편에 설 수 없다”고 밝히고 이를 한일 양국 정부에 발송했다.

이성환 계명대 교수는 “미국이 강화조약에 독도를 일본령으로 표기하지 않은 것은 독도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 두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역설적으로는 한국의 독도 영유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고 해석했다. 또한, “러스크 서한을 한국 정부에만 전한 것 또한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모호성을 남겨 장래 그 해결을 양국의 교섭에 미루려던 미국의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동북아역사재단 도시환 책임연구위원은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주목할 부분으로 조약 제21조(조약의 제3자적 효력)를 들었다.

제21조는 “중국은 본 조약 제 25조의 규정에 관계 없이, 제10조 및 제14조(a)2의 이익을 받을 권리를 가지며, 한국은 제2조, 제4조, 제9조 및 제12조의 이익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했다. 그중 제2조에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기재되었다.

조약 초안에 독도를 한국령으로 명시했다가 일본령으로 한 차례 바꾸고, 최종적으로 독도 명시를 제외한 바로 그 조항이다. 강화조약은 이 조문에 대해 ‘한국의 이익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한 것이다.

현재 일본은 쿠릴열도에 대해서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부정하고, 독도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에 대해서는 강화조약을 인정하는 등 일관성 없이 자국에 유리한 측면에서 편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과거 역사상 인류에 대해 저지른 중대 범죄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아

그동안 일본이 주장해 온 ‘1905년 무주지 선점론’과 ‘17세기 고유영토론’은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가 독도를 울도군 관할로 명시한 칙령 제41호 관보 게재, 1454년 《세종실록》 〈지리지〉 기록을 비롯한 역사 기록들과 지도, 서양 고지도 등에 의해 논리의 모순을 지적받는다. 특히, 일본 스스로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선언한 1696년 울릉도쟁계 후 에도막부의 도해금지령, 1877년 일본 메이지정부의 최고 행정기관 태정관이 발한 ‘태정관지령’으로 인해 모순과 흠결이 있다.

국제법학자 히로세 요시오의 국제법사관에 근거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식민지배는 국제법상 합법이며, 1905년 당시 무주지 선점이 합법이었다’는 논리도 조약에 관한 국제법학계의 일관된 태도에 의해 모순과 흠결이 지적된다. (관련 기사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1905년 당시도 지금도 국제법상 불법”)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의 식민 지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도 합법이며,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으로 전쟁 책임에서도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울대 홍종욱 교수는 지난해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한 동북아역사재단 전문가 세미나에서 “최근(2022년 3월 23일) 영국 윌리엄 왕세손이 과거 식민지인 자메이카를 방문했을 때 자메이카 정부가 공식적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다”며 "식민 지배와 관련한 문제들은 앞으로 해결되어야 할 현재진행형"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올해 3월 29일(현지시간) 영국 유력 일간지 가디언은 200년 전 설립자들이 노예제에 관여한 것을 사과하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또한, 앞으로 10년간 과거 노예제 피해자들 후손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 남동부 시 제도諸島나 자메이카에 약 160억 원에 해당하는 1000만 파운드 규모의 배상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과거 역사에서 인류에 대해 저지른 중대 범죄가 당시 일반적인 사례였다는 이유로 당연시되거나 그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