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러일전쟁 후 독도를 실효적 지배하려 했다
-일본 주일미군 끌어들여 미일행정협정에 따라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독도 동도에서 바라본 서도.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독도 동도에서 바라본 서도.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일제가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해저 케이블을 만드는 때가 1905년 11월이다. 러일전쟁이 그해 9월에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끝난 다음이었는데도 독도에서 일본까지 연결하는 케이블을 깐다는 것은 독도를 실효 지배하려고 했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흔적이라 볼 수 있다.”

조건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울릉군 울릉읍 사동 1리 아랫구적마을 인근 해저케이블 육양(陸揚)지점에서 해당 유적이 뜻하는 바를 강조했다.

경북 울릉군 울릉읍 사동 1리 아랫구적마을 인근 일제 해저케이블 육양지 표석과 케이블(붉은색 원 안). 사진 강나리 기자.
경북 울릉군 울릉읍 사동 1리 아랫구적마을 인근 일제 해저케이블 육양지 표석과 케이블(붉은색 원 안). 사진 강나리 기자.
표석 앞 해저케이블. 사진 강나리 기자.
표석 앞 해저케이블. 사진 강나리 기자.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은 독도의 날을 앞두고 지난 18일~21일 3박 4일 일정으로 재단 출입 언론인 대상 독도특강 및 탐방을 진행했다. 일정 중 20일 오후 러일전쟁 당시 일제가 울릉도 보루산 정상에 설치한 망루(현재 해군 레이더기지)와 연결하고자 물밑에서 뭍으로 끌어올린 해저케이블 육양지를 방문했다.

지금은 풀숲이 우거진 바닷가 유적 현장에는 작은 표석과 깨진 플라스틱 반구로 덮힌 케이블 가닥이 있을 뿐이었다.

울릉도 보루산 정상에 설치된 망루. 현재 해군 레이더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울릉도 보루산 정상에 설치된 망루. 현재 해군 레이더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일제 해저케이블 유적 인근 바닷가. 사진 강나리 기자.
일제 해저케이블 유적 인근 바닷가. 사진 강나리 기자.

조건 연구위원은 “일제는 러일전쟁이 한창인 1904년 9월부터 큐슈 나가사키 인근 지금도 미군이 주둔하는 해군항인 사세보를 시작으로 쓰시마, 부산 그리고 울진(죽변), 울릉도로 가는 케이블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해저케이블 설치 이전에 독도에는 이미 러시아 함대를 감시할 망루와 무선전신 기지가 있었다. 하지만 무선전신은 배와 배 사이에 무선으로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가 서로 많이 떨어지거나 다른 여러 주변 환경에 따라 통신이 끊긴다. 가장 안정적인 선을 깐 것”이라고 해저케이블 설치 이유를 말했다.

실제 해저케이블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848~1934) 제독이 이끄는 일본연합함대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1905년 5월 동해해전(일본 측 명칭 쓰시마해전)에 활용되었다.

일제 해저케이블 육양지 표석 앞 케이블은 평소 플라스틱 반구 안에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일제 해저케이블 육양지 표석 앞 케이블은 평소 플라스틱 반구 안에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또한, 조건 연구위원은 “독도는 1905년 2월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일본에 강제로 빼앗기게 되었고,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1946년 1월 29일 내린 스카핀(SCAPIN) 제677호 훈령에 의해서 우리 땅으로 확실하게 확보가 되었다”라며 “전에 노무현 대통령께서 말했듯 ‘독도는 가장 먼저 빼앗겼다가 가장 나중에 되돌려받은 우리 땅, 우리 영토’”라고 했다.

조건 연구위원은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데 1905년 당시 일본은 독도를 실효 지배하려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적이기 때문에 망루와 함께 연결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정비 관리했으면 한다”라고 방문 취지를 밝혔다.

한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극비(極秘) 메이지(明治) 37~38년 해전사」 발굴을 통해 러일전쟁 이전인 1899년에 이미 독도에 군사기지를 세우고자 했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독도가 러시아의 동해 종단 계획과 일본의 동해 횡단 계획의 교차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러일전쟁 초기인 1904년 5월 중국 뤼순항 전투에서 해군 전력의 1/3을 잃고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해 러시아 해군을 감시했다. 독도 망루 설치는 1904년 9월 해군 군령부가 조사를 명령해 시작되어 1905년 8월 준공했다. 일본 해군이 러일전쟁 기간에 한국영토에 설치한 20개 망루 중 마지막 망루였다.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가 제작한 일제의 해저케이블 노선도(왼쪽)과 망루.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홍성근 교육홍보실장 발표자료.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가 제작한 일제의 해저케이블 노선도(왼쪽)과 망루.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홍성근 교육홍보실장 발표자료.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배한 이후에도 독도에 대한 도발을 계속했다. 그중 하나가 독도 폭격사건 이후 해제된 독도 폭격연습지 지정을 일본 주도로 재차 이루어진 일이다.

‘독도 폭격사건’은 1948년 6월 8일 예고 없이 진행된 미공군의 오인 폭격으로 동해안의 어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150여 명이라는 증언이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홍성근 교육홍보실장은 “이때 한국 주둔 미24군단에서 특별조사단을 꾸려 조사하고, 하지 중장이 극동군 사령부에 ‘독도는 울릉도 사람들의 최대 조업지’라며 폭격 연습지에서 해제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고 했다. 이때 미군의 보상과 함께 1950년 경북도지사가 독도를 방문해 위령제를 하고 비석을 세웠다.

1948년 독도 폭격사건 이후 1950년 경상북도지사가 독도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세운 독도조난어민위령비 재연품(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비는 독도 동도 몽돌해변가에 건립되었는데 1950년대 후반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유실되었다가 2015년 독도 선착장 인근 수중에서 발견 인양되었다. 사진 강나리 기자.
1948년 독도 폭격사건 이후 1950년 경상북도지사가 독도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세운 독도조난어민위령비 재연품(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비는 독도 동도 몽돌해변가에 건립되었는데 1950년대 후반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유실되었다가 2015년 독도 선착장 인근 수중에서 발견 인양되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이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일본 주변에 선포한 해역선인 맥아더라인이 소멸되자 1952년 1월 한국전쟁 중인 대한민국은 독도를 포함한 경계선인 평화선을 선포했다.

홍성근 교육홍보실장은 “그러자 일본은 문제 제기를 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을 끌어들여서 ‘미일 행정협정’에 따라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지정했다”라며 “우리 조사단에 의해 발각되고 미군에 항의해 이를 해제하는 절차가 있었다”고 밝혔다.

일본외무성이 독도를 폭격연습지 지정을 주도한 것은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기 위한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한편, 2000년 전후로도 일본전기통신공사가 독도 중심으로 16마일까지 일본 본토에서 해저광케이블을 설치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독도 소유권 주장 때문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