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은 176건의 외교문서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에서 벌인 일본 어민의 각종 불법행위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양국 간 교섭 과정 속 영유권 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집이 출간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일제의 독도‧울릉도 침탈 자료집(3) 조선과 일본 왕복 외교문서' 가 지난 22일 발간되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일제의 독도‧울릉도 침탈 자료집(3) 조선과 일본 왕복 외교문서' 가 지난 22일 발간되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은 ‘일제의 독도‧울릉도 침탈 자료집(3)- 조선과 일본 왕복 외교문서’를 지난 22일 발간했다.

이번 자료집은 2021년부터 재단이 추진한 ‘일제의 독도‧울릉도 침탈자료집’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박한민 재단 연구위원이 편찬책임자를 맡고 박범 공주대 사학과 교수와 한성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교수가 번역을 맡았다.

1881년부터 1904년까지 한일 정부가 주고받은 울릉도 관계 외교문서는 한자와 소로분候文이라 불리는 일본 고어체로 작성되어 그간 접근하기 어려웠는데 이번에 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양국 간 외교문서 내용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 연안까지 진출해 어업과 벌목 활동을 한 조선과 일본 어민의 출신 지역, 도서 지역 거주생활상은 물론 일본 어민들의 각종 불법행위에 대한 조선 정부의 공식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본공사관이나 외무성에서 조선‧대한제국 정부의 항의를 어떻게 묵살하면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일방적으로 관철해 나가며 침략성을 드러냈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근대 시기 일본은 1875년 9월 운요호 사건을 발단으로 조선과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부산을 비롯해 이후 향후 2개 항(원산, 인천항)을 개항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서구열강이 일본의 항구를 강제로 개항하게 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모양새이다.

조선 정부는 울릉도를 한 번도 개항장으로 지정한 바 없었다. 그러나 동해와 접해있는 일본 시마네현, 돗토리현, 야마구치현 출신 어민들이 조선 울릉도‧독도까지 무단으로 침범해 어업과 벌목, 탈취, 행패를 빈번하게 벌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항은 17세기 말 조선 숙종대 안용복과 관련된 울릉도 쟁계 이후 일본 막부에 의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울릉도는 조선의 관할 아래 있으므로 각 지역 일본인들은 도항하지 말라는 결정이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이어졌다. 1877년 3월 일본 태정관太政官에서도 “죽도(울릉도 지칭) 외 일도一島의 건에 본방은 관계가 없음을 명심할 것”이라는 지령을 내린 상태였다.

1877년 3월 29일 일본 메이지정부의 '태정관지령'.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1877년 3월 29일 일본 메이지정부의 '태정관지령'.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조선‧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도항금지령을 어기고 울릉도로 건너온 불법 입도자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요구하고, 동남 연해와 섬에 대한 영유권을 적극 행사하기 위해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로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불법행위 때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단속하고 퇴거 조치를 취하거나 엄히 처벌해 줄 것을 일본공사에 요청했다.

자료집에 수록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태도는 시기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1881년 예조판서 심순택이 일본 어민의 울릉도 도항에 정식 항의하며 정부 차원에서 단속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을 때 일본공사관에서는 조사를 거쳐 일본인들의 울릉도 벌목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을 철수시켰다고 통지하겠다고 성명했다.

그러나 하야시 곤스케가 주한일본공사로 재직하는 1899년 이후로 갈수록 조선 정부의 퇴거 요청에 불응하려는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1900년 9월 조선 외부대신이 울릉도에 침투해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퇴거를 요구하자 하야시는 “오로지 울릉도에서만 우리나라 사람들을 퇴거시키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라며 일본인들의 울릉도 거류는 조약 위반이기는 하나 관습이 되었다면서 퇴거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1902년 10월 울릉도 체류 일본인의 퇴거 요구와 더불어 일본 측이 울릉도에 경찰서를 설치한 것은 조약 위반이라고 문제를 제기하자 하야시는 조약상의 형식에만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며 조선의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 이를 통해 당시 일본이 앞세우는 근대적 조약마저 위반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는 한번도 울릉도를 개항한 적이 없다. 사진 울릉군청 누리집.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는 한번도 울릉도를 개항한 적이 없다. 사진 울릉군청 누리집.

이번에 발간한 자료집에는 1885년 초 조선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사절관련 문서, 대한제국 주일공사관의 울릉도감 배계주 관련 문서 등이 포함되었다.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외교문서 원본 뿐 아니라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소장된 원본 자료 문서철까지 두루 수록한 점이 특징이다.

내용 중에는 동남제도개척사의 활동, 울릉도감 배계주의 도일과 목재반환 소송, 울릉도 체류 일본인 조사를 위한 한일 공동조사단 파견, 일본 군함의 조선 연해 측량 등 다양한 사안이 포함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특히, 대한제국 정부에서 울릉도와 독도에 울도군을 설치해 울도군수가 독도를 관할하도록 규정한 1900년 칙력 제41호가 제정되던 시기 울릉도와 독도 관련 한일관례 흐름을 파악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