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까지도 홀로코스트 범죄로 희생된 피해자를 모두 찾지 못했다는 데에 우리가 배상 협약을 계속 개정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독일은 전 세계에 산재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대표하는 ‘대독일 유대인 청구권 회의(JCC)’와 1952년 ‘룩셈브루크 협약’을 체결해 배상을 해왔는데, 60주년이 되는 2012년 독일이 주도해 협약을 개정했다.

이유는 구공산권에 거주했기 때문에 배상에서 제외되었던 생존자 8만 명을 다시 찾아냈고, 이들에 대한 추가 배상을 하기 위해서다. 위에서 언급한 발언은 당시 독일 재무장관 볼프강 쇼이블레의 말이다.

독일은 룩셈부르크 협약 70주년인 지난 2022년 9월에도 또다시 피해자들에게 1조 8천억 원을 추가 배상하겠다고 밝히고, 나치의 만행이 잊히지 않도록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에도 4년간 1천 4백억 원을 지원키로 했다. 사진 SBS 뉴스 갈무리.
독일은 룩셈부르크 협약 70주년인 지난 2022년 9월에도 또다시 피해자들에게 1조 8천억 원을 추가 배상하겠다고 밝히고, 나치의 만행이 잊히지 않도록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에도 4년간 1천 4백억 원을 지원키로 했다. 사진 SBS 뉴스 갈무리.

이에 JCC 협상책임자인 스튜어트 E. 아이젠스타트 전 유럽연합 주재 미국대사는 “독일은 역사적 범죄의 책임에 있어 가장 모범적인 국가”라며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동원한 성노예 등 전쟁범죄 관련 책임 문제에서 보이는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평가했다.

독일, 명백한 사과와 전쟁 피해자 배상 위한 끊임없는 노력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과 똑같은 입장이던 독일은 유럽 내 각국 국민의 적개심을 해소하고 유럽연합(EU)의 동반자이자 핵심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일본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과의 관계에서 전쟁 책임과 피해자에 대한 배상 회피, 각국 국민의 감정적 앙금 등으로 여전히 불편하다. 양국은 어떻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나.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독일은 패전 직후부터 훗날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국가재건을 위한 경제부흥에 총력 매진했다. 하지만 전쟁 피해국인 주변국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상품을 판매할 시장도 없으며, 어떠한 상호협력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독일 리더들의 판단”이었고 “자발적이자 선도적으로 나서서 피해배상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했다.

가장 큰 피해국인 프랑스와 1960년 ‘나치 피해 포괄배상협정’을 체결한 후에도 일본이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 소멸을 주장하는 것과 달리 추가적인 피해배상 문제를 해결하고자 1981년 ‘독일-프랑스 이해증진재단 출연 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강제동원 피해 노동자의 배상을 위해 2000년 다시 ‘기억‧책임‧미래 재단’을 설립해 2007년까지 100여 개국에서 160만 명의 피해자에게 44억 유로, 약 5조 38억 원을 배상했다. 그러고도 2012년 룩셈부르크 협약을 개정한 것이다.

도시환 책임연구위원은 “결국 일본은 한 번으로 최종 완결됐다고 계속 강조하는 그런 나라인데 반해 독일은 스스로 끊임없이 피해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라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2010년 7월 한국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일본 지식인 5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한일 양국 지식인 1,139명이
2010년 7월 한국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일본 지식인 5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한일 양국 지식인 1,139명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원천무효"라는 공동성명을 냈다. 한 달 후인 8월 열린 국제 학술회의 장면.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독일의 전쟁 책임 배상의 출발이 경제적 목적이었다고 하나 거기에 그쳤다면 정치적 제스쳐로 인식되고, 양차 세계대전의 직접 피해 당사국 국민의 응어리진 분노를 풀진 못했을 것이다.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 앞에서 빗속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당시 세계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총리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라고 할 만큼 반향은 컸다.

아울러 전쟁피해에 대한 배상뿐 아니라 현재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나서 기여했고, 지금도 EU에서 핵심국으로서 책임을 충실히 수행해나가고 있다.

일본, 책임과 사과 회피 … 1965년 한일협상 완결론 고수

독일과 일본이 걸어온 서로 다른 행보, 이에 따라 자국이 속한 지역에서 위상은 전혀 다르다. 그 차이를 살펴보자.

첫째, 독일은 전쟁범죄에 대한 ‘변명 없는 사과’와 현실적인 노력과 실행을 통해 그 진정성을 입증했다. 그 성실함은 피해국과 피해 당사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정도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부터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또한, 2015년 12월 양국 외교부가 체결한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에서도 일본이 거출한 자금을 통해 해당 문제가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종결’이라는 문구를 못 박았다. 이는 가해자가 돈을 줄 테니 피해자 본인도, 한국도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태도이다.

게다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한 무상 3억불의 성격을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협력자금’이라고 못 박아 전쟁 책임에 의한 배상이 전혀 아니라는 입장이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해당 출연금에 대한 성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당시 외무상이자 현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이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출연금의 성격을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이라며 국가책임을 회피했다.

2015년 12월 한일 양국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앞서 열린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한중일 국제학술회의.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2015년 12월 한일 양국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앞서 열린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한중일 국제학술회의.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사과 대신 ‘유감’, ‘애도’ 등 교묘한 외교적 수사나 문제의 소지가 있는 문구를 통해 책임을 회피하고 있어 전후 78년이 지나도 전쟁 피해자의 분노는 풀리지 않고 여전하다. 오히려 반복되는 왜곡과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고 할 것이다.

독일과 일본의 두 번째 차이는 독일 빌리 브란트 총리 외에도 정치지도자들이 일관된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집권당이 달라져도 변함없이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일본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한 적이 있다. 1993년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20개월에 걸친 조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군의 개입으로 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심각하게 손상시킨 행위”라며 사과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일명 고노 담화이다.

일본 사민당 출신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1995년 전후 5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공식적인 사죄를 담은 일명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2001년 아시아여성기금과 관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과거 일본군이 수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일본 총리로서 진심어린 사과와 사죄의 뜻을 전한다”는 내용으로 직접 사과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과정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는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의 1대 1 전화통화에서는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일 합의 후 불과 3개월이 안 되는 2016년 2월 UN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심의 당시 스기야마 신스케 외무성 심의관은 강제연행을 부정했다. 같은 해 3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연례 연설에서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하자,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사실에 반反하는 것”이라며, 피해자 스스로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왜곡했다.

2018년 대법원 판결 장면.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일본기업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2018년 대법원 판결 장면.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일본기업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또한, 아베 총리에게 "고이즈미 총리와 같이 사죄의 편지를 쓸 의향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추호도 그럴 의사가 없다”라고 답했다. 일본은 사과와 비슷한 정치적 제스쳐와 그에 명백히 반하는 정치지도자의 발언, 태도로 끊임없이 되돌이표를 찍고 있다.

독일과 일본의 명백한 차이,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

독일과 일본의 명백한 세 번째 차이는 자국민에 대한 교육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주변국에 피해를 주었을 뿐 아니라 자국민을 전쟁터로 끌고 들어갔다. 독일은 나치즘이 다시 발호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국민을 교육했다. 이는 전후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그 태도에 변함없을 것이라는 분명하고도 명확한 의사 표명이다.

하지만 일본은 ‘역사 수정주의’를 통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자국에 유리하게 입맛대로 각색하고, 교과서 검정을 통해 자국민, 특히 청소년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주고 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전후 세대에게 전범국이 아닌 원폭 피해국의 이미지를 덧씌우며, 패전 후 전쟁 포기와 국가 교전권 불인정을 명시한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여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일본은 19세기와 20세기 서구 국가들에 당한 불평등조약을 가까운 조선, 중국 등 주변국에 강요하며, 자국은 아시아의 국가가 아니라 서구의 일원이 되겠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선언했다.

지금도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미래를 향해 발맞춰 나갈 동반자가 아니라 서구의 일원이고자 했던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일 문제에 있어서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 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있다.

미래를 함께 설계할 동반자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은 ‘신뢰’이다. 한일 간 역사현안을 해결하고 진정한 화해의 전형을 유럽의 전범국이던 독일은 묵묵히 실천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전문에서 명시한 유엔헌장 원칙 준수와 세계인권선언 실현 의무 수행을 통해 진정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구축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