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칼을 든 여검객, 장원급제한 남장 여성,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에 간 소녀, 전쟁 영웅이 된 기생, 양반의 빰을 때린 다모, 대낮에 한것 멋을 내고 술에 취해 한양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노처녀라니, 지금까지 배운 조선의 역사에는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이다.  

《조선의 걸 크러시》(임치균 강문종 임현아 이후남 지음, 민음사, 2023)에 나오는 여성들은 요조숙녀와 현모양처라는 정체성을 거부하거나 뛰어넘고, 받아들이더라도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억압적인 세계와 충돌하고 파격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며 주체적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조선의 센 언니들이다.”

신간 "조선의 걸 크러시"  사진 민음사
신간 "조선의 걸 크러시" 사진 민음사

 

그러니 이 책을 보면 곧바로 조선의 여성은 가정에서만 지내며 남편에게 손종하며 자녀양육에만 힘썼을까? 요조숙녀와 현모양처로만 사는 데 만족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렇게 믿었다면 이제 생각을 바꾸고 조선 시대 여성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볼 기회이다. 

이 책은 양반이 아닌 보통 사람의 다양한 직업을 망라해 화제가 되었던 《조선잡사: ‘사농’ 말고 ‘공상’으로 보는 조선 시대 직업의 모든 것》을 잇는 기획이다.

고전소설을 전공하는 저자들은 조선 시대 여성 중에서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유형의 여성들보다는 주체적 내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지닌 여성들을 주목했다. 실록과 문집 같은 역사적 기록을 포함해 한문 단편소설, 야담, 국문소설 등을 주 자료로 분석했고, 기존 연구 성과들 역시 충실히 참고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앞에서 조선 여성 40명의 삶을 소환했다.

《조선의 걸 크러시》는 시대적 구속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며 자신의 꿈과 포부를 펼치려 했던 여성들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1부 복수를 실천한 여성에서 2부 조선 시대의 여성 경찰 다모를 비롯해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소를 처단한 여성 등 영웅의 기상을 지녔던 여성을 다루었다. 3부에서는 남성을 능가하는 여성 시인, 소설가, 학자 들을 다룬다. 4부에서는 자신만의 기준과 노력으로 사랑을 찾아 나선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5부에서는 뛰어난 기개와 재주를 지닌 여성들을 모았다.

《조선의 걸 크러시》는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 준다. 남편과 결혼하여 7년 동안 성관계에서 만족을 거의 느낄 수 없었던 한 여성은 마침내 이혼신청서를 작성했다. 이 여성은 성적 욕망을 윤리적 혹은 도덕적 이유로 억누르지 않았다. 심지어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매우 적극적으로 행사했다. 9년간의 소송으로 남편의 이혼 청구에 저항한 신태영의 이야기는 남성 사회가 집단으로 신태영에게 가한 억압적 폭력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여성들의 사적 복수를 의롭다고 칭찬한 영조와 정조에게서는 법보다 효를 중시한 위정자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또한 소설 <방한림전>의 동성혼 서사에서는 태동하는 여성주의를, 소설 <이춘풍전>에서는 흔들리는 남성 우위를 읽어내 조선 말의 급변하는 질서를 살핀다.

그런가 하면 조선에 당당한 페미니스트도 있다. “이 세상 남자들이 모두 나의 남편감이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자신감 있게 살았던 노처녀 삼월이다.” 한양 한복판에서 한껏 멋을 낸 삼월이는 대낮에 술에 취해 저잣거리를 활보하다 국가에 반역을 꾀한 역적의 잘린 머리 앞에서 그 빰을 후려치기도 했다. 가부장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인 요조숙녀나 요리와 바느질, 옷감 만들기, 남편 내조, 자식을 돌보는 현모양처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삼월이는 스스로 만든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살아갔다. 그녀는 가부장제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손바탁으로 세게 후려친 조선의 페니미스트다!

시대를 거스르고 자아를 이룬 이들을 통해 조선 여성의 새로운 모습을 생생하게 본다.  조선 여성을 오로지 요조숙녀, 현모양처로 보는 우리의 관념을 깨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