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의 동도. 동도의 최고봉은 우산봉이며 오른쪽이 독립문 바위, 동도에는 헬기장과 독도경비대, 인터넷위성기지국, 등대 등이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독도의 동도. 동도의 최고봉은 우산봉이며 오른쪽이 독립문 바위, 동도에는 헬기장과 독도경비대, 인터넷위성기지국, 등대 등이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이던 지난해 4월 11일 일본 정부는 국제정세와 외교활동 전반을 정리해 매년 펴내는 외교청서를 통해 또다시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을 침해한 바 있다.

일본의 독도 영토주권 왜곡 침해 행진은 올해도 진행 중이다. 2월 25일 시마네현의 일명 ‘다케시마의 날’ 기념행사에 정부 고위간부가 참석하고, 3월 22일 일본 중학생들이 내년부터 배울 교과서 검정을 통해 침해를 되풀이해 연례행사를 방불케 한다.

과거 일본 정부는 무주지 선점론, 17세기 고유영토론을 내세웠으나 무주지 선점론은 국제법상 흠결로, 고유영토론은 1693년 울릉도쟁계 이후 에도막부와 메이지 정부가 꾸준히 독도를 일본 땅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한 증거로 인해 힘을 잃었다.

현재 일본 정부가 역사적 진실 은폐와 왜곡을 통해 제기하는 독도영유권 주장의 근간은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조약을 동원한 법리적 왜곡으로 귀결되고 있다. 해당 조약은 일본이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의 책임청산과 동아시아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이다.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최종안에 한국에 돌려주어야 할 영토에서 독도가 빠졌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전에 독도가 적법하게(?) 일본 땅이 되었으므로 돌려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 주장의 정책적 토대를 구축해온 일본 국제법학계의 법리 왜곡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2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법리 분석을 통해 한국의 독도주권을 재조명한 〈한국의 독도주권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도시환 편)을 발간해 일본 국제법 논리의 문제점을 비판‧반박했다.

또한,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어난 친일파 윌리엄 시볼드의 로비 사건, 러스크 서한, 그리고 델러스 미 국무장관의 전문 등 사건들을 통해 실상을 조명했다.

지난 2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연구총서〈한국의 독도주권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지난 2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연구총서〈한국의 독도주권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 카이로선언은 연합국의 공식적인 대일영토정책
    …일본이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추방 원칙
-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1차~5차 초안까지 독도는 한국령

연합국의 대일 영토정책의 기본원칙인 카이로선언은 일본이 ‘폭력과 탐욕으로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추방’을 명시하고 한국의 해방과 독립을 명시했다. 그 기본원칙을 포츠담선언과 일본의 항복문서가 계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전범국 일본의 영토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에 대한 연합국들의 공식적인 입장은 매우 명확했다. 독도는 한국영토라는 것이다.

대일 영토정책의 기본원칙이자 기초문서인 ▲카이로선언(1943.12.1.)을 기점으로 ▲포츠담선언(1945. 7.26.) ▲항복문서(1945. 9. 2),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가 발효한 ▲SCAPIN 제677호(1946. 1.29), ▲SCAPIN 제1033호(1946. 6.22)을 경유해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제1차부터 제5차 초안까지 독도는 한국령으로 표기되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중국과 소련, 한국에 양도될 지역과 관련한 내용 중 한국에 대해 “(일본이)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를 포함한 한국 근해 모든 부속 소도서와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권원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샌프란시스코조약 발효시까지 독도를 일본에서 분리한다는 방침 하에 SCAPIN 제677호에서 일본에서 제외되는 도서로 울릉도와 독도를 규정하였다. 일명 맥아더 라인으로 일컫는 SCAPIN 제1033호에서는 독도 12해리 이내 접근금지를 명시해 독도와 그 영해, 근접수역을 한국의 영토와 영해로 재확인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제6차 초안에서 유일하게 독도가 일본령으로 변경되었다가 이후 최종안에서는 독도 표기 자체가 사라졌다.

샌프란시스코 제6차 초안의 급작스러운 변화 과정에 주일 미국 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William J. Sebald)가 개입했다. 일본계 아내를 둔 친일인사인 윌리엄 시볼드는 맥아더의 극우 반공노선 덕분에 출세한 외교관이었다.

시볼드는 1949년 11월 14일 긴급 전문과 이를 문서화 한 11월 19일 의견서에서 일본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했다. “리앙쿠르암(독도)을 우리가 제안한 제3조에서 일본에 속하는 것으로 특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들 소도서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유효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을 한국 해안의 도서들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또한, 안보 측면에서 고려할 때, 이들 도서에 기상 및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결부된 사안이다.”

시볼드의 주장은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제작해 미국에 제공한 ‘일본의 부속 소도서, Ⅳ 태평양 소도서, 일본해 소도서’라는 팸플릿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원용한 것이었다. 시볼드 보고서가 제출된 이후인 1949년 12월 29일 작성된 미국의 제6차 초안에 독도를 일본령으로 변경하고, 명칭도 일본명 ‘다케시마’를 사용했다.

그 배경에 대해 캐나다 워털루대학 하라 키미에(原貴美惠) 교수는 “1949년 후반 냉전의 격화, 공산주의의 국제적 확대와 중국 정권을 장악한 직후라는 배경이 있다. 일본은 미국의 아시아전략에서 중핵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장래가 불투명한 한국의 중요성은 2차적이었다. 실제 1950년 1월 발표된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은 제외되어 있었다. 북한 공산정권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당시에 미국은 독도가 한국의 영토가 아닌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후 조약 최종안까지 독도에 대해 일본령이란 표현도, 당초처럼 한국에 반환할 도서로 표기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했다. 왜일까?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 당시 모습.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 당시 모습.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의 독도주권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편찬책임자인 동북아역사재단 도시환 독도실장은 “결국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독도 주권 문제에 관해 명시적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당시 일본이 연합국을 설득하여 기존 입장을 변경하는 데 실패한 것”이라고 밝혔다.

알렉시스 더든(Alexis Dudden)은 “독도의 지위에 대한 미국의 최종적 결정이 지닌 불확정성은 이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대한 미국 정부의 불안감을 보여준다. 독도에 대한 미국의 접근법은 미국이 일본 영토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영유권 문제를 상황에 따라 즉각적으로 결정할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즉, 문제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어 회피하는 지점에 이르도록 하되 향후 미국의 개입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항에 독도의 귀속을 미해결 상태로 남겨 둔 미국의 의도는 양의적 해석이 가능하도록 모호하게 하여 장래 양국의 교섭에 의한 해결을 도모한 것으로 분석된다.

독도는 미국의 대공산권 전략의 소재로 활용된 것일뿐 미국이 독도에 대한 초기 인식을 부정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한 것은 아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일본 국제법학자 우에다 도시오 등은 “일본이 인정한 ‘한국의 독립’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당시의 한국영토를 일본으로부터 분리 독립시키는 것”이라며, “강제병합 이전인 1905년 무주지 선점론에 입각해 취득한 독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앞서 밝혔듯 연합국의 대일영토정책의 원칙인 카이로선언이 규정한 ‘폭력과 탐욕으로 약취’한 시작점을 일본이 자의적으로 한일강제병합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불법 강점이 러일전쟁의 발발보다 앞선 조선전쟁에서 이미 시작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4년 1월 21일 전시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 대해 1904년 2월 6일 일본 해군이 진해만과 마산시의 전신국을 강제 점령으로 일본의 불법침탈은 시작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비롯해 원천무효인 침략과 조약 강제는 일본이 주장하는 1905년 독도편입 이전인 1904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카이로선언에서 당시 장제스가 청일전쟁(1894~1895)을 일본의 ‘폭력과 탐욕’ 기점으로 제시했고, 미국 정부 문서도 청일전쟁을 그 기점으로 제시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1947년 초안에는 전후 일본 영토를 확정하기 위한 기준일로 1894년 1월 1일을 명시한 바 있다.

조약의 초안에 있는데 최종안에 없으면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일까? 오시진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는 〈한국의 독도주권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사실 국제사법제판소 등은 조약의 문면이 명확한 경우라 할지라도 조약문을 해석할 때 그 준비 문서에 의존하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밝혔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은 냉전체제의 대두로 인해 징벌조약에서 반공조약으로 기조가 전환되면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관대한 강화조약’이 됨으로써, 일본은 전범국임에도 오히려 최대 수혜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강화조약을 전제로 동아시아평화공동체 구축에 역행하는 영토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법리를 자국에 유리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폭력과 탐욕’으로 약취한 독도를 끊임없이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영토라 주장하는 것이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