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직후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독도를 지킨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선글라스 착용)과 대원들. 사진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누리집 갈무리.
한국전쟁 직후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독도를 지킨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선글라스 착용)과 대원들. 사진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누리집 갈무리.

“멋있게 살아라!”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늘 해주던 조언이었단다. 홍순칠의 ‘칠’은 일곱째 자식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엄동설한의 울릉도 미끄러운 섬 바위를 헛디뎌 일곱 달 만에 조산한 ‘칠삭둥이’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지금도 일부 응급 환자가 생기면 당장 육지로 가지 못해 목숨을 잃거나 큰 후유증을 감당해야 하는 섬 주민인데 하물며 대일항쟁기 1929년에 태어난 칠삭둥이라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불 속 솜을 꺼내 꺼져가는 생명을 감싸 안아 끝내 그를 살려냈다.

동북아역사재단 홍성근 교육홍보실장(독도교육연수원장)이 지난 20일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에서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33인의 이야기를 기자단에게 전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동북아역사재단 홍성근 교육홍보실장(독도교육연수원장)이 지난 20일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에서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33인의 이야기를 기자단에게 전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지난 20일 동북아역사재단 홍성근 교육홍보실장은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에서 “홍순칠에게 할아버지는 단순히 혈육이 아닌 생명의 은인이고, 할아버지의 말은 그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라고 했다.

또한, “젊은 시절 홍순칠 대장은 온갖 멋을 부렸지만, 울릉도 청년들과 독도를 지키겠다는 결의를 하고 나서 ‘이게 진짜 멋있게 사는 거다’라 했다”고 소개했다.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2층 전시된 홍순칠 대장 모습. 그는 수비대 경험을 담아〈이 땅이 뉘 땅인데〉라는 책을 썼다. 사진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제공.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2층 전시된 홍순칠 대장 모습. 그는 수비대 경험을 담아〈이 땅이 뉘 땅인데〉라는 책을 썼다. 사진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제공.

 

맑은 날에는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앞 전망대에서 댓섬 너머 멀리 독도의 서도가 보인다. 사진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누리집.
맑은 날에는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앞 전망대에서 댓섬 너머 멀리 독도의 서도가 보인다. 사진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누리집.
지난 20일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전망대 앞에서 댓섬 너머 멀리 독도를 향해 촬영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지난 20일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전망대 앞에서 댓섬 너머 멀리 독도를 향해 촬영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울릉도 석포 일출일몰전망대 인근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은 맑은 날 독도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자리 잡았다. 건물은 독도의 동도와 서도를 모티브로 했으며, 33인의 독도의용수비대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 공간에는 1953년 6.25 한국전쟁 직후 혼란 속에서 동쪽 바다 먼 무인도 독도까지 직접적인 행정력이나 국방력이 미처 미치지 못할 때 독도를 지켜낸 울릉도 청년 33인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독도의용수비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사용한 목대포. 제대로 된 군사장비가 없던 수비대는 나무를 깎아 실제 박격포인 양 천천히 독도 근해에 접근하는 일본 순시선을 겨눠 퇴각시키기도 했다. 사진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제공.
독도의용수비대가 사용한 목대포. 제대로 된 군사장비가 없던 수비대는 나무를 깎아 실제 박격포인 양 천천히 독도 근해에 접근하는 일본 순시선을 겨눠 퇴각시키기도 했다. 사진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제공.

이들은 1953년 4월 20일 독도에 상륙하여 1956년 12월 30일 국립경찰에 수비업무와 장비의 전부를 인계할 때까지 활동했다. 1954년에는 일본 순시선을 격퇴하는 독도대첩 승전을 이끌기도 했다.

대장 홍순칠, 부관 황영문 휘하에 제1전투대(대장 서기종), 제2전투대(대장 정원도), 후방지원대(대장 김병열), 교육대(대장 유원식), 보급대(대장 김인갑)를 갖춰 체계적으로 활동했다.

독도의용수비대 조직도. 자료 조석종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장 발표자료.
독도의용수비대 조직도. 자료 조석종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장 발표자료.

독도 동도에서 일본의 독도 침탈을 막던 그들의 환경은 열악했다. 워낙 변화무쌍한 바다 날씨인지라 7~10일씩 울릉도에서 오는 보급이 끊기기도 했다. 그나마 서도에는 ‘물골(샘)’이 있어 식수가 있지만, 동도에는 식수조차 없었다.

“그럴 때는 미제 철제 드럼통 안쪽을 불로 그을려 3~4개씩 묶어 뗏목처럼 띄우고 건너가 드럼통 안에 1/4씩 물을 채워 동도 수비대 자리로 돌아오기도 했다. 드럼통을 가득 채우면 물에 가라앉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독도를 수비하던 독도의용수비대의 모습을 담은 디오라마. 사진 강나리 기자.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독도를 수비하던 독도의용수비대의 모습을 담은 디오라마. 사진 강나리 기자.

홍성근 교육홍보실장은 “홍순칠 대장이 큰아버지”라고 소개하고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란 그들에 관한 생생한 에피소드를 전했다.

독도의용수비대에게 업무를 인계받은 독도경비대원 중에는 수심 2,000미터가 넘는 깊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82년 11월 5일 교대근무를 하고자 수비대 2명이 큰 배에 딸린 작은 전마선을 타고 접안하다가 높은 파도에 휩쓸려 실종된 일이 있었다. 이때 이들의 시신이 서도 물골 앞에 잠시 떠올랐다 가라앉자 이방윤 해녀가 시신을 건졌다.

독도의용수비대에게서 독도 경비업무를 인계받은 독도경비대의 1960년대 모습. 시계방향으로 독도경비대의 박격포 훈련. 보급물자 하역, 독도경비대원들. 사진 독도박물관. 촬영 강나리 기자.
독도의용수비대에게서 독도 경비업무를 인계받은 독도경비대의 1960년대 모습. 시계방향으로 독도경비대의 박격포 훈련. 보급물자 하역, 독도경비대원들. 사진 독도박물관. 촬영 강나리 기자.

동도를 독도의용수비대가 지켰다면 서도에서는 울릉도민 최종덕 씨가 제주 해녀들을 채용해 활발한 바다 수확을 하고 있었다. 최종덕 씨는 1965년 3월 수산물 채취를 목적으로 최초로 독도에 거주한 민간인이기도 하다.

(위) 독도에서 활약한 해녀들의 물소중이 복장. (아래) 독도에 교대근무를 가려다 파도에 휩쓸려 희생당한 경비대원들의 시신을 건진 이방윤 해녀에게 수여한 울릉경찰서장의 감사장. 자료 독도기념관 촬영 강나리 기자.
(위) 독도에서 활약한 해녀들의 물소중이 복장. (아래) 독도에 교대근무를 가려다 파도에 휩쓸려 희생당한 경비대원들의 시신을 건진 이방윤 해녀에게 수여한 울릉경찰서장의 감사장. 자료 독도기념관 촬영 강나리 기자.

그는 수천 미터 바다에 물소중이만 입고도 뛰어드는 ‘나잠’에 익숙한 제주 해녀에게 9mm이상 두꺼운 고무잠수복과 머구리를 쓰고 공깃줄을 연결해 깊은 바다에서 채취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를 통해 겨울에도 해삼, 전복 등을 채취할 수 있어 큰 수확을 거뒀다.

그럼 독도의용수비대, 그들의 시작은 어땠을까? 기념관 한 켠에는 나무 팻말들이 무질서하게 놓인 전시공간이 있다. 해방 직후 혼란기 일본에서 몰래 독도에 잠입해 꽂아둔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죽도)가 여기다”라고 적힌 팻말들이다.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된 계기가 된 팻말전쟁.(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사진 강나리 기자.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된 계기가 된 팻말전쟁.(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사진 강나리 기자.
한일 간 치열했던 팻말전쟁의 이력. 왼쪽 하단 사진 중 가장 왼쪽은 욀본측에서 세운 팻말로 '시마네현 오치군 고카촌 다케시마'라고 써 있다. 그 오른쪽은 한국 측에서 세운 표석으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라고 써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한일 간 치열했던 팻말전쟁의 이력. 왼쪽 하단 사진 중 가장 왼쪽은 욀본측에서 세운 팻말로 '시마네현 오치군 고카촌 다케시마'라고 써 있다. 그 오른쪽은 한국 측에서 세운 표석으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라고 써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울릉군청에서는 수시로 일본이 무단으로 설치한 나무 팻말을 거두고 그 자리에 돌로 된 한국령 표시 팻말을 세웠다. 그리고 뽑아온 일본의 나무 팻말을 군청 마당에 쌓아놓았다. 그 팻말들에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청년들이 분노했다.

독도가 삶의 터전이던 이들은 3년여를 한국전쟁의 전쟁터에서 보내고도 또다시 일본에 맞서 국토를 지켜내고자 나섰다. 기념관에는 입구 안내문에는 그들을 ‘마지막 의병’으로 정의했다.

마지막 의병으로 정의된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입구. 사진 강나리 기자.
마지막 의병으로 정의된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입구. 사진 강나리 기자.

전시관에서는 의병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가가 외침으로 인해 위태로울 때 정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조직하는 자위군."

독도의용수비대 33명 중 그동안 28명이 사망하고 행방불명 1명이며, 현재 박영희, 서기종, 오일환, 정원도 대원 총 4명이 생존하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지킨 독도에 세워진 한국령 표석. 기념관 재연품. 사진 강나리 기자.
독도의용수비대가 지킨 독도에 세워진 한국령 표석. 기념관 재연품. 사진 강나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