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배우 송혜교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여성 최초의 의병장 '윤희순' 영상을 다국어로 제작해 국내외에 공개했다. 이미지 서경덕 교수실
제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배우 송혜교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여성 최초의 의병장 '윤희순' 영상을 다국어로 제작해 국내외에 공개했다. 이미지 서경덕 교수실

제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배우 송혜교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여성 최초의 의병장 '윤희순(尹熙順, 1860~1935)' 영상을 다국어로 제작해 국내외에 공개했다.

이번 영상은 서 교수가 기획하고 송혜교가 후원했으며, 한국어와 영어 내레이션으로 각각 제작해 국내외 누리꾼에게 전파하고 있다.

영상은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 모태는 바로 '의병'이라는 점과 여성 최초 의병장인 윤희순의 삶을 상세히 소개한다.

특히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으로 시작한 항거는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하고, 이후 서간도로 망명하여 학교를 설립하는 등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의 항일운동을 재조명했다.

윤희순 여성의병장은 여성의병단 조직, 탄약제조소 운영 등의 적극적 의병운동 지원에 힘썼을 뿐 아니라,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제작하며 구국활동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많은 여성이 의병운동에 참여하도록 ‘안사람 의병가’, ‘안사람 의병노래’ 등을 지어 여성들도 구국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제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여성 최초의 의병장 '윤희순' 영상을 제작해 공개한 배우 송혜교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 이미지 서경덕 교수실
제105주년 삼일절을 맞아 여성 최초의 의병장 '윤희순' 영상을 제작해 공개한 배우 송혜교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 이미지 서경덕 교수실

윤희순은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아버지 윤익상과 어머니 평해 황씨의 큰 딸로 태어났다. 윤익상은 인조반정 공신이었던 윤희평의 후손으로 대대로 유학자 집안이었다. 윤희순은 16세에 고흥 유씨 집안의 유제원(柳濟遠)과 결혼하여 강원도 춘천 남면 발산리에서 거주하였다. 유제원은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며,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이다.

1896년 단발령이 발표되자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시아버지 유홍석도 춘천유림들과 함께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의병운동에 나섰다. 유홍석이 의병활동으로 열 달 동안 집을 비운 사이 며느리 윤희순은 날마다 아침 시아버지의 무사 귀가와 의병의 전승을 기원하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또한 의병을 도와주자는 내용의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에게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1907년 일본이 한국 군대를 해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유홍석은 춘천에서 유중악, 유영석, 유제곤 등과 함께 의병 600명을 모아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윤희순은 초기 을미의병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에 나섰다. 군자금을 모집하고 여성 30여 명으로 여성의병을 조직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이 후일을 기약하고 중국으로 먼저 떠났다. 윤희순은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아들 돈상, 민상, 교상 등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때부터 1935년까지 25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요동지구를 떠돌아다니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초 윤희순은 요녕성 동고촌 뒷산 밑으로 이주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들 유돈상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장인 음성국과 함께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그 후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집에 돌아오던 중 윤희순의 품 안에서 순국하였다. 윤희순도 아들 유돈상이 숨진 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83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영상을 기획한 서 교수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국내외에 널리 소개하고자, 지난해 정정화 영상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윤희순 영상을 제작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향후 삼일절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에 관한 다국어 영상을 '시리즈'로 제작해 국내외에 꾸준히 알려나갈 계획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