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로 불리는 최근까지 우리 교육에서 고쳐지지 않는 병폐로 지적하는 지나친 학력 경쟁과 학벌주의, 과열된 입시경쟁, 대학 서열화, 그리고 학교가 인격도야의 장이 아니라 상급학교 입시준비 기관으로 전락한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27일 오후 ‘일제강점기 교육정책의 연구 방향’을 주제로 심포지움에서 해당 문제의 뿌리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초등‧중등‧교등 교육정책에 있다는 점을 분석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4월 27일 '일제강점기 교육정책의 연구방향'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재단은 4월 27일 '일제강점기 교육정책의 연구방향'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 조선 지배에서 ‘교육’을 ‘식민지시혜론’의 중요한 근거로 자주 거론한다. 하지만 발표자들은 식민지 조선의 교육은 매우 제한적이고 차별적이며 억압적이었음을 지적했다.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초등교육에서 학교 설립과 경영에 들어가는 경비를 조선 수요자들에게 떠넘기는 ‘수요자 부담’ 정책으로 교육의 공공성이 크게 상실되었다. 이는 조선사회의 경제난, 남성 중심 가부장 질서와 맞물려 여성을 초등교육에서 제외시켰다.

일제강점기 식민교육은 교육의 공공성 상실과 여성배제, 교원의 교육력 약화를 비롯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병폐로 지적되는 교육분야 문제를 야기했다. 사진 국학TV, 역사로 보는 정치 티스토리 갈무리.
일제강점기 식민교육은 교육의 공공성 상실과 여성배제, 교원의 교육력 약화를 비롯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병폐로 지적되는 교육분야 문제를 야기했다. 사진 국학TV, 역사로 보는 정치 티스토리 갈무리.

또한, 조선인 교육에 필요한 학교의 절대 부족으로 초등교육 입학부터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고, 중등교육 분야가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으로 변질되었다. 아울러 고등교육(대학) 단계에서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사립전문학교라는 서열구조가 구축되었다.

연구자들은 관보와 통계 연보를 비롯해 기타 조선총독부가 생산한 공문서 등 관찬 자료와 당시 신문, 잡지 기사, 개인의 일기 및 회고록 등 다종다양한 자료를 통해 생생하고 풍부한 정보를 공개했다.

조선총독부, 일본어 잘하고 성실하게 일할 ‘충량한 신민 육성’이 교육목표

먼저, 초등교육과 관련해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김광규 연구위원은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 교육의 목적을 일본어를 잘하고, 성실 근면하게 노동에 종사하는 ‘충량한 신민 육성’임을 분명히 했다”며 1894년 근대 개혁기 조선이 학교 설립과 운영 면에서 강한 공공성을 띠던 근대 초등교육의 방향이 비틀어진 일제강점기 초등교육 실태를 밝혔다.

김 연구위원은 일제의 초등교육의 시기별 구분을 △ 강점 초기-폭압적 차별교육이 제도화 된 시기 △1920년대- 3.1운동 이후 동화와 차별의 혼종기 △1930년대-실업교육이 강화되고 교육의 질이 저하된 시기 △일제 말 전시기-교육이 붕괴된 시기로 특정해 설명했다.

모든 보통학교는 최소 1명 이상의 일본인 교원이 있었고, 조선총독부는 실업교육, 직업교육,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학교 차원에서 농업을 경영하게 하고, 여기에 교원과 학생의 노동력을 동원했다. 또한, 사립학교는 요구사항을 갖춰 인가를 받아야만 정규 학교가 될 수 있었고, 사설 학술강습회와 서당은 부족한 보통학교의 보완책으로 보존하지만 통제하면서 지원은 하지 않는 체제였다.

아울러 일본인 교원의 높은 봉급을 부담하면서 조선총독부가 정한 교육정책에 따라 일본어로 공부하고, 일본 축제일에 일본 천황에게 경배하는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 학력을 인정받을 수 없는 체제였다.

일제는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 중 징병제 시행과 함께 초등교육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초등학생의 전쟁동원까지 했다. 사진 일제강제동원피해지원재단 누리집.
일제는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 중 징병제 시행과 함께 초등교육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초등학생의 전쟁동원까지 했다. 사진 일제강제동원피해지원재단 누리집.

그는 “교육의 목적은 학구열, 출세욕 등 사적 측면과 국가와 민족, 사회에 교육의 결과와 효과를 공유하는 공적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그러나 일제는 학교 관련 경비를 조선인 수요자 부담으로 하면서 입학 후에도 수업료 부담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 일본어로 교육받아야 하고, 일본인 교원의 차별적, 폭력적 언행을 견뎌야 하는 상황 속에서 악전고투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받은 교육의 효과를 사회에 나누어 누려야 한다는 인식을 희미하게 했다”며 식민교육으로 인해 교육의 공공성 후퇴를 지적했다.

또한, 그는 “일제강점기 초등학교가 교육의 공간인 동시에 치열한 민족 대립의 현장”이었다며 선행연구자 오성철이 ‘보통학교 팽창은 조선인과 조선총독부의 서로 다른 의도가 부딪히는 복잡하고 미묘한 동상이몽의 장’이었다는 연구를 소개했다.

그는 “조선인은 강점 초기 취학 거부로 맞섰다가 취학으로 대응을 바꾼 후부터 조선총독부에 초등교육 확대를 요구하며 비판과 저항, 요구를 멈추지 않았다. 반면, 조선총독부는 공립보통학교의 물적 시설과 교원을 사회교화의 도구로 이용했고, 교원은 조선총독부의 하급관료 신분”이었다고 했다. 또한, 전시 체제 하에서 징병제 시행과 함께 초등학생의 전쟁 동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