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통의부 발족 보도 신문 기사(1923.3.10)   [이미지 국가보훈처]
대한통의부 발족 보도 신문 기사(1923.3.10) [이미지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강제하·이웅해·백남준·최명수 선생을 2022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2022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웅해(李雄海)·백남준(白南俊)·강제하(康濟河)·최명수(崔明洙) 네 분은 남만주 통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이끌어 간 주도적 인물들이다.

1920년 전후 중국 동북지역을 거점으로 결성된 한인 독립군 단체가 일제를 상대로 독립전쟁에 나서 승리를 거두자 일제는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자행하여 한인사회와 독립군 기지를 초토화하였다. 참변을 극복하고자 환인현(桓仁縣)에 모인 독립운동 단체 대표 50여 명은 남만한족통일회의를 열고 통합의 방법을 논의하여 남만주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했다.

통의부는 중앙조직 구성과 의용군 편성을 통해 자치와 무장투쟁을 전개하며 남만주 지역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통합 독립운동체인 통의부는 두 가지의 임무 달성을 목표로 했다. 첫째는 경신참변으로 폐허가 된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립군의 근본 목표인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해 이어가는 것이었다.

대한통의부 발행 어음(1원)   [이미지 국가보훈처]
대한통의부 발행 어음(1원) [이미지 국가보훈처]

 

1878년 함경남도 함주군 상기천면 오노동에서 출생한 이웅해 선생은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했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웅해 선생은 통의부를 출범하기 위한 회의인 남만한족통일회의에 22명의 동지와 함께 대한독립군 대표로 참가했다. 통의부가 탄생한 난 후에는 김동삼 총장 아래 편성된 8개의 자치조직 중 민사부장에 선임되었다.

통의부는 성립 후 자치와 무장 활동을 충실히 수행하며 남만주지역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웅해 선생은 계속 남아 민사부장에 이어 재무부장을 맡으며 통의부를 이끌었다.

참의부에서도 그와 함께하기를 원했으나 모든 것을 뿌리치고 북만주로 옮겨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그 후 1928년 12월 무렵 일제 경찰대에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남만한족통일회의 개최 시 광복군총영의 대표로 참가한 백남준 선생은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 독립군 지휘관 중 한 명이다.

대한통의부 훈련 모습. [이미지 국가보훈처]
대한통의부 훈련 모습. [이미지 국가보훈처]

 

남만주 흥경현으로 망명하여, 교육자 및 한인단체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20년 초, 서간도 관전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속의 광복군이 성립되었고 무장활동 별동대인 광복군총영을 조직했다. 백남준 선생은 오동진이 총영장이 되어 이끈 부대의 군사부장 겸 참모부장에 선임되어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남만한족통일회의에 백남준 선생은 김창의·장영해 등 4명이 동지들과 광복군총영의 대표로 참가해 통의부가 성립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나 초기에는 통의부의 직책은 맡지 않았다.

1923년부터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11월 24일 통의부에 이은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성립 시까지 이 직책으로 통의부를 이끌어간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성립된 후, 한국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지자 피체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에서 권업부장으로 활동한 강제하 선생은 정의부에 이어 조선혁명당에 이르기까지 남만주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했다.

통의부 성립초기 강제하 선생은 기존의 독립군 세력을 수습하느라 함께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곧 통의부에 가담해 독립군의 모태가 되는 한인사회와 독립군의 생계를 책임지는 권업부장을 맡았다.

통의부는 1924년 11월 24일 서로군정서 등 7개 단체와 통합해 정의부를 성립시켰다. 정의부에서 강제하 선생은 중앙행정위원에 선임되고, 이후 정의부에서 대표회 위원,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며 단체의 최고위 간부로서 역할을 다했다.

2022년 8월의 독립운동가 최명수 선생  [이미지 국가보훈처]
2022년 8월의 독립운동가 최명수 선생 [이미지 국가보훈처]

강제하 선생은 조선혁명당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이후 남만주의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어 갔다. 대한민국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명수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가 곧바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국내에서 건너 온 신민회(新民會)인사들과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0년을 전후해 서간도로 망명한 민족운동자들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경학사를 세웠다. 이후 통화현으로 옮겨 조직의 체계를 새롭게 하고 단명을 부민단(扶民團)으로 바꿨다. 최명수 선생은 단총(團總)에 선임되어 부민단의 실무를 이끌었다.

통의부에서 최명수 선생은 검무국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통의부에 이어 1924년 11월 정의부가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 탄생했다. 최명수 선생은 이 단체가 출범할 수 있도록 전만통일회에 길림주민회 대표로 참가했다. 정의부가 성립되고 초기 조직을 정비할 시기 자치분과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조직이 완비되고 난 후에는 검리장(檢理長)에 임명되었다.

1920년대 후반 만주를 떠나 상하이(上海)로 갔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활동 중 1934년 12월 6일 일제의 상하이영사관 경찰대에 피체되었고 국내로 압송되어 1935년 6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