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시대 문명의 도전과 지식의 전환》(김선희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22)은 ‘문명의식’이라는 관점에서 숙종 대 조선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저자 김선희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숙종 시대를 특징짓는 예송(禮訟)과 환국(換局) 정치를 당시 정치적 분화의 표현형으로 보고 그 기저의 문법을 대보단·만동묘(萬東廟)·관왕묘(關王廟) 같은, 전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주목되지 않았던 새로운 정치 공간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고 이 정치 공간을 운용하는 논리와 이념을 ‘문명의식’이라는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책은 조선이 스스로를 명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내세운 ‘중화(中華)’와 야만이자 이단이지만 조선이 수용하고자 했던 서양의 지식 즉 ‘서학(西學)’을 연구의 두 축으로 삼아 숙종 대 조선이 경험한 문명의 복잡성과 이중성을 검토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중화’라는 단일한 문명의 이념과 ‘서학’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자원이 동시에 작동하던 숙종 대 조선의 문화적, 정치적, 지적 도전의 과정을 다면적으로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김선희 지음. "숙종 시대 문명의 도전과 지식의 전환" 표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제공]
김선희 지음. "숙종 시대 문명의 도전과 지식의 전환" 표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제공]

숙종(肅宗, 재위 기간 1674~1720)이 집권했을 때는 정치 세력들이 각 당파로 분화하여 강력한 긴장을 형성하던 시기였다. 숙종은 전면적인 정권 교체를 함으로써 당파 간 긴장을 완화하거나 분쇄하고자 했다. 이때 숙종이 택한 환국(換局)은 붕당 간 경쟁과 긴장을 활용해 왕이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었다. 경쟁하는 세력들을 단번에 조정하여 권력을 이동시킴으로써 경쟁하는 신권(臣權)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숙종은 또한 궁궐 안에 대보단을 설치하고 임진왜란 때 명군이 설치한 관왕묘에 행차하였다. 또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어필(御筆)을 중국 변경의 시장에서 구입하여 이를 판각하고 감격과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러한 행위가 조선 내부를 향하고 있다고 본다. 청에 대한 원망과 명에 대한 존숭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해 숙종은 대보단·관왕묘·어필의 상징성을 청이나 명의 유민(遺民)이 아니라 오로지 조선 내부에서 경쟁하고 갈등하는 정치 세력들에게 발신한 것이다. 그렇다면 숙종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청을 향한 복수설치(復讐雪恥)도 명을 향한 재조지은(再造之恩)도 아닌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내부적인 공인이었을지 모른다. 문명의식을 정치 문법으로 구축해 분열과 긴장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숙종은 온화했던 선왕 현종과는 달리, 강력한 문제해결의 의지로 반대를 돌파할 수 있는 강단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그만큼 많은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의지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숙종은 내적으로는 왕조의 정통성과 왕권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외적으로는 강희제(康熙帝) 치세의 청으로부터 문화·기술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서학의 유입은 중국은 물론 중국의 지적, 문화적 변화에 민감했던 조선과 일본에도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였다. 당시 유럽에서 보편화되기 시작한 자명종 역시 중국과 조선에 특별한 지적 자극이 되었다. 숙종 대에는 일본에서 모사된 자명종을 참고해 조선에서도 자명종이 제작되기도 했다. 이처럼 숙종 재위기의 조선은 자신의 창을 통해 청의 지적, 문화적 자원들을 도입하는 한편 청에 유입되어 있던 서양 문물을 수용하며 나름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유학자들도 개별적으로 조선에 유입된 서학서를 읽으며 그 안에서 유학과 연결가능한 지식을 발출하려고 노력했고 조정 역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조선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숙종 대에는 연행(燕行)을 통해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양인과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로 직접 교류할 수 있었다. 이기지의 연행록 《일암연기(一菴燕記)》 를 보면, “저는 천지의 동쪽 끝에 살고 당신은 서쪽 끝에 사는데, 지금 이곳에서 얼굴을 마주하니, 어찌 하늘이 베푼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영묘한 마음은 그대와 내가 다르지 않을 것이니 마음이 통한다면 어찌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지겠습니까?”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조선인들은 수준 높은 서양 문물을 경험하고 나서 서양인이 오랑캐가 아니라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영묘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서로 통할 수 있는 문명의 담지자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검토한 저자는 숙종 대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 시기는 문명의식으로서의 중화주의가 제도 차원에서 작동하던 시기이며 동시에 서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조선이 문명의 관념이 복수로 작동할 수 있음을 자각하던 시기였다. 중화로 표상되는 문명의식이 만든 파장은 한편으로 조선 내부에서 예송과 북벌, 만동묘와 대보단을 통한 명의 계승 등의 방식으로 나타났다. 자기 안과 밖의 타자를 제고하고 스스로 정통을 자임하던 조선이지만 동시에 이 시기 조정과 지식인들은 타자이자 오랑캐였던 서양의 지도와 자명종, 시헌력을 수입하고 서학서를 탐독하는 등 모순적인 시도를 통해 자생력과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숙종 재위기는 조선을 둘러싼 다양한 힘과 지식들이 만든 긴장으로 인해 내부에 다양한 지적 층차가 발생하던 전환의 시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로 이어지는 숙종 시대의 다양한 사건과 정치적 실천, 지적 시도를 일관된 관점으로 직조해나감으로써 일정부분 조선 후기를 새롭게 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