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강기덕(康基德 1886~미상) 선생을‘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독립기념관(관장 한시준)은 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강기덕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2월 1일부터 2월 28일까지 개최한다. 신간회 강령 등 8점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볼 수 있다.

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 강기덕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강기덕(康基德 1886~미상) 선생을 ‘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 강기덕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강기덕(康基德 1886~미상) 선생을 ‘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강기덕 선생은 3·1운동을 시작으로 신간회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이후에도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선생은 188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명 중의 한 명(학생대표, 보성법률상업학교 재학 중)으로 독립선언서를 각 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민족대표 48인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을 포함하여 3·1운동 준비 및 기획 단계에 참여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선생은 1919년 2월 손병희(孫秉熙)·이갑성(李甲成) 등 민족대표로부터 3·1독립운동이 계획을 지시받고 김성득(金性得)·김형기(金炯機)·김문진(金文珍)·김원벽(金元璧) 등과 함께 각 학교 학생들의 시위참여에 관한 일체의 임무를 맡았으며, 주로 서북친목회(西北親睦會)를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신간회 강령(1927).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신간회 강령(1927).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500장을 받아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를 소집하여 각 학교에 이를 배부하고 학생간의 연락책임을 맡았다. 또한 3월 4일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기숙사에서 각 전문학교 학생 지도급 대표와 장채극(張採極)·전옥결(全玉玦)·강우열(康禹烈) 등 중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서울학생 제2차 만세시위계획을 세우고 김원벽과 함께 제2차 운동의 최고 지휘자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에서 강기덕 선생은 인력거를 타고 선두에서 깃발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시위를 주도하였다.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첫 번째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만기 출소하여 고향인 원산에서 인쇄업에 종사하면서 원산·덕원지역 청년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3월 경 강기덕이 운영하는 덕흥인쇄소는 원산 보광학교의 3·1운동 5주년 기념 삐라를 만든 곳이기도 하다.

선생은 1923년 함경남도 덕원군에서 민립대학설립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樓氏女子高等普通學校) 학부형회 부회장을 맡은바 있다.

신간회 원산지회 회원들.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신간회 원산지회 회원들.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1923년 1월 원산교풍회(元山矯風會)를 조직하여 폐습(弊習) 철폐에 앞장서고, 8월에는 함남도민대회를 개최하여 지역민의 열악한 생활환경 개선에 힘썼다.

1924년 3월경 원산 보광학교 3·1운동 5주년 기념 인쇄물을 제작하며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1926년에는 덕원청년동맹(德源靑年同盟)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농촌문화 향상을 위한 순회강연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농민의 참담한 현실을 강조하며 경작제도의 문제를 개선하여 농민들의 수입증진을 위한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다시 한 번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소 후 선생은 신간회 원산지회 발기인회에 참여하여 설립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을 맡았고, 1927년 7월 11일 신간회 원산지회 설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합작한 좌우연합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대일항쟁기 가장 규모가 컸던 사회운동 단체이다.

선생은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 당시 함남기자연맹에도 소속되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대책 마련과 신문지법 중단을 촉구하였고, 소작쟁의에 관한 불량지주의 죄악 조사를 요구하다 징역 8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1929년 11월 만기 출소하여 1930년 신간회 원산지회 지회장에 선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산 학생들이 일으킨 일제 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1930년 2월 또다시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1931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신간회 활동을 이끌었다. 신간회 지회 여론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로 신망을 얻어 중앙집행위원장을 임명된 것이다.

선생은 원산노동조합 간부로서 노동조합의 재건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933년 또다시 징역 1년 2개월 옥고를 치렀고, 1935년 만기 출소했다. 이처럼 선생은 대일항쟁기 독립운동과 그로 인한 옥고로 대부분을 보냈다. 

광복 이후에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 중앙위원을 맡아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꿈을 실현하지 못하였고,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강기덕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