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군산 3·5만세운동은 호남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만 3만 7,000여 명에 달하였고, 사망 및 부상자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전북 곳곳에서 28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군산 3·5만세운동은 영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계획하고 노동계와 종교계가 조직적으로 전개한 전 민족적, 전 민중적 운동으로 자주독립을 꿈꾸는 우리 민족의 염원과 저항정신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두열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이두열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2022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호남 최초 만세운동인 군산 3·5만세운동의 주역인 이두열·고석주·김수남·윌리엄 린튼 선생을 선정했다.

1919년 2월 말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군산 영명학교 졸업생을 통해 3·1운동 계획을 들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선생과 구암교회 부속여학교(멜볼딘 여학교) 교사 고석주 선생은 호남지역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만세운동이 이루어진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고석주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고석주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우선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예수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들, 교회 신자들, 선생들에게 교육을 받아 민족의식을 가졌던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이끌어냈다.

거사일을 3월 6일 장날로 잡고 학생들과 함께 영명학교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인쇄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하던 만세운동은 거사 직전, 낌새를 눈치챈 일본 경찰의 급습으로 두 분의 선생과 학생들이 체포되면서 거사가 좌절될 위기에 처했다.

이를 본 학생간부 등은 긴급회의를 열어 3월 6일로 예정되어 있던 만세운동을 3월 5일로 앞당겼다. 학생, 예수병원 사무원, 교회 신자들이 함께 남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뿌리며 만세를 외쳤고, 거리에 있던 인파가 이 대열에 합세하여 체포된 교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군산경찰서까지 나아갔다.

김수남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김수남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위기를 느낀 일본 경찰은 익산에 주둔하던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이두열 선생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3년을, 고석주 선생도 같은 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군산 영명학교는 1903년 선교사 젠킨이 세운 학교이다. 군산 3.1운동 당시 붙잡힌 사람들 대부분이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의 교사, 학생들이었다. 졸업생들은 인근 지역의 3.1운동도 주도하였다.

당시 노동일에 종사하던 김수남 선생은 동료 이남률 등과 함께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는 친일교육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영명학교의 3·5만세운동 이후 군산공립보통학교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학생 감시와 단속이 더욱 심해졌고, 이런 가운데 3월 14일 학생 70여 명은 동맹하여 연서로 퇴학원을 제출하며 항거했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학부형을 소환하여 끈질긴 회유와 협박으로 이를 방해하였다. 이를 지켜본 김수남 선생은 독립운동에 방해만 되는 친일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워 버리기로 결심했다.

선생은 이남률과 3월 23일 밤 11시에 학교에 들어가 건물 동남쪽 출입구에서 불을 붙여 학교 건물 1개 동을 전소시켰다. 친일교육의 상징이던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워 조국독립의 열망을 표현했던 선생은 방화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모진 옥고를 치렀다.

영명학교에서 교육선교를 시작했던 윌리엄 린튼 선생은 미국으로 돌아가 일제의 잔학한 식민통치와 한국인들의 저항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역설하였다.

윌리엄 린튼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윌리엄 린튼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1912년 22세에 선교사로 한국에 온 선생은 1년 만에 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한글로 성경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쳤다. 1917년 전임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선생은 영명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선생은 군산 3·5만세운동 당시 교사들과 학생들의 준비를 묵인하고 은밀히 지원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군산에서 발생한 만세운동 참가자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고문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선생은 애틀랜타에서 남장로교 평신도 대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지역신문 애틀랜타 저널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상황을 기고하는 등 지속적으로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하였다.

"3월 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윌리엄 린튼 기고문, 1919년 5월, 독립기념관 제공)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선생은 1937년 9월 6일 일제 경찰이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학생들을 강제로 모아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반발하며 폐교 청원을 제출하였다. 이에 신흥학교가 폐교하기에 이르렀고, 선생은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두열 선생과 고석주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수남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그리고 윌리엄 린튼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은 2022년 3월의 독립운동가 두열, 고석주, 김수남, 윌리엄 린튼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3월 1일부터 31일까지 한달 간 개최한다.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군산 영명학교 학교 건물 사진 등 6점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