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 선생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 선생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0.01.0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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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정용기 선쟁을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독립기념관은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관련 전시회를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1월31일까지 한 달간 개최한다. 전시회에는 충효재 사진 등 7점을 전시한다.

2020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관련기관과 개인 등의 추천을 받아 내외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서 공적 등을 심층 논의하여 선정한다.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 정용기(鄭鏞基 1862.12.13~1907.9.2) 선생은 경북 영천 출신이다.

산남창의지(하) 밀지 관련 내용.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 책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고종은 시종관(侍從官) 정환직을 불러 군주를 대신하여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和泉之水)’를 이야기하며 의병을 일으킬 밀지(密旨)를 내렸다. [사진=독립기념관]
산남창의지(하) 밀지 관련 내용.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 책동이 노골화하자 고종은 시종관(侍從官) 정환직을 불러 군주를 대신하여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和泉之水)’를 이야기하며 의병을 일으킬 밀지(密旨)를 내렸다. [사진=독립기념관]

선생은 1862년 충절가문으로 알려진 영일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지만, 1887년 아버지 정환직이 벼슬에 오르자 함께 상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 책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고종은 시종관(侍從官) 정환직을 불러 군주를 대신하여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和泉之水)’를 이야기하며 의병을 일으킬 밀지(密旨)를 내렸다. 노나라 성공(成公) 2년 서기전 580년 제 경공(傾公)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제남(濟南)에 와 안산(鞍山)에 진을 쳤다. 극극(郤克)은 진(晉)나라 군사를 이끌고 경공에 맞섰다. 역사는 이 전쟁을 ‘제진안지전(濟晉鞍之戰)이라고 한다. 전투 결과 제나라 군사를 크게 패해 경공은 진군의 전차에 쫓기게 되었다. 제 경공이 포로가 될까봐 수레를 몰던 봉축보(逢丑父)는 경공과 옷을 바꿔 입고 경공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진군이 다가오가 봉축보는 경공에게 수레에서 내려 화천(華泉)으로 가서 물을 길어오도록 했다. 그때 경공을 보좌하던 전차가 나타나 경공을 싣고 달아났다. 봉축보는 물론 사로잡혔다. 화천지수(華泉之水)는 여기서 유래하여 신하가 군주를 대신하여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화천은 중국 산동성 화산(華山) 남쪽에 있어 화천이라고 부르며 화수(華水)라고도 한다. 거대한 호수로 길이는 15미터, 폭은 9미터, 깊이는 2미터이다.내렸다.  부친 정환직은 고종의 밀지를 받들어 그날 관직에서 물러났다.

짐망화천지수전세비. 을사늑약 이후로 상하 인심이 들끓고 대소 정사를 일제가 간섭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시종관 정환직을 불러 "경은 화천지수를 아는가"하고는 "짐망(朕望)"이라는 두 글자를 하사하였다. 그것은 "짐은 화천지수를 바란다(朕望貨泉之水)"는 뜻이었으니 나를 대신하여 군사를 일으키라는 것이었다. 이때 일제의 감시가 매우 심하여 정환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눈물을머금고 나와 큰아들 용기에게 말하였다. "나는 국가의 중대한 명을 받아 몸이 죽어도 갚고자 한다. 너는 귀가하라" 그러나 용기는 '군신부자는 하나'라는 뜻을 울면서 말하고 아버지를 따랐다.  [사진=독립기념관]
짐망화천지수전세비. 을사늑약 이후로 상하 인심이 들끓고 대소 정사를 일제가 간섭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시종관 정환직을 불러 "경은 화천지수를 아는가"하고는 "짐망(朕望)"이라는 두 글자를 하사하였다. 그것은 "짐은 화천지수를 바란다(朕望貨泉之水)"는 뜻이었으니 나를 대신하여 군사를 일으키라는 것이었다. 이때 일제의 감시가 매우 심하여 정환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눈물을머금고 나와 큰아들 용기에게 말하였다. "나는 국가의 중대한 명을 받아 몸이 죽어도 갚고자 한다. 너는 귀가하라" 그러나 용기는 '군신부자는 하나'라는 뜻을 울면서 말하고 아버지를 따랐다. [사진=독립기념관]

부친 정환직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1906년 1월경 ‘영천창의소’를 설치하고, 권세가(勸世歌)를 비롯한 각종 통문, 격려문을 지어 일본인들이 들어와 문명과 종사가 무너지는 것이 을사 5적들 때문임을 지탄하고, 충성심 있는 의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역적들과 왜적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대한독립만세의 기치를 들고 모두 함께 의병으로 나설 것 등을 호소하였다.

그 해 2월 정용기는 의병 1,000여 명의 추대로 의병 대장이 되었고, 영남지역 의진이란 뜻의 ‘산남의진’을 이름으로 정하여 본격적인 항쟁을 준비하였다. 선생은 신돌석 의진과 연합작전을 펴기 위해 진군하던 중 같은 해 4월 아버지 정환직이 경주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용기는 급히 경주로 향했지만, 이는 산남의진을 막기 위한 경주 진위대의 계략이었다. 결국 정용기는 경주진위대에 체포되어 대구경무소에 구금되었고, 4개월간 고초를 겪고 석방되었다.

진중일지 표지. [사진=독립기념관]
진중일지 표지. [사진=독립기념관]

 

그 사이 대장을 잃은 산남의진은 병사들은 상당수 떠나버렸고 남은 군사들도 사기가 크게 떨어져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4개월 동안의 고초와 시달림에서 몸을 돌보고 있던 차에 대구에서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경북지역에서도 고령 성주 김천 상주 등 여러 지역에서 많은 관련 단체를 조직하여 동참하였다. 영천지역에서는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가 조직되자 선생은 회장으로 취임하여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진중일지. [사진=독립기념관]
진중일지. [사진=독립기념관]

 

1907년 4월에 선생은 의진을 다시 결성하여, 소규모 지역 의병부터 군인 출신까지 많은 이들이 뜻을 함께하였다. 7월부터 본격 활동을 시작한 산남의진은 포항 청하, 영천 자양, 청송 등지로 진군하면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관동으로의 북상 준비 및 각 지대와의 연락을 위해 각지로 의병들을 파견한 뒤, 본진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장으로 이동하여 입암계곡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일본군에게 역습을 당해 1907년 9월 주요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충효재. 정용기와 아버지 정환직을 추모하기 위해 생존 지사들과 유족들을 중심으로 1934년 2월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26번지에 충효재(忠孝齋)를 건립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충효재. 정용기와 아버지 정환직을 추모하기 위해 생존 지사들과 유족들을 중심으로 1934년 2월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26번지에 충효재(忠孝齋)를 건립하였다. [사진=독립기념관]

 

선생이 전사한 후 부친 정환직이 의진 총수를 맡았으나 일본군 영천수비대에게 잡혀 대구로 압송 중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정용기 선생 부자를 생존 지사들과 유족들을 중심으로 1934년 2월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26번지에 충효재(忠孝齋)를 건립하였다. 광복 후에는 산남의진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1963년 3월에는 영천시 창구동 조양각 후원에 ‘대장정공양세순국기념 산남의진비(大將鄭公兩世殉國紀念 山南義陣碑)’를 세웠다. 1988년 11월에는 충효재 뜰에 ‘화천지수전세비(華泉之水傳世碑)’를 세워 양세의병장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정부는 정용기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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