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윤봉길(1908.6.21~ 1932.12.19) 의사를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윤봉길 의사는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여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1929년에는 월진회를 설립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윤봉길 의사 선서 장면. [사진=국가보훈처]
윤봉길 의사 선서 장면. [사진=국가보훈처]

1930년 3월 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기고 가족을 떠나 고향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윤봉길 의사는 이후 중국 상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을 논의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거를 결심하였다.

의거 3일 전 1932년 4월 26일 윤봉길 의사는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였다. 이 의거가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를 대변한다는 점을 세계에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김구 선생(왼쪽)과 윤봉길 의사. [사진=국가보훈처]
김구 선생(왼쪽)과 윤봉길 의사. [사진=국가보훈처]

 

의거 당일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사람이 운집하였다.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 윤봉길 의사는 앞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수통형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터져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이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이로써 침략의 원흉들을 처단하였다.

의거 후 윤봉길 의사가 연행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의거 후 윤봉길 의사가 연행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윤봉길 의사의 이 의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임시정부에 중국이 전폭 지원하게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일제는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1932년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가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윤봉길 의사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윤봉길 의사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중국을 침략하는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사진=국가보훈처]

 

일제는 의사의 유해를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광복 후인 1946년 조국에 봉환,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