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5월 31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일항쟁기 한인애국단에서 일본군 고위 관료 처단을 위해 군사교육과 의열투쟁을 주도한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을‘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면서 침략의 원흉인 일본군 주요 인물을 처단하기 위해 1931년 김구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결성된 단체이다.

2022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안경근 선생. [이미지 제공 국가보훈처]
2022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안경근 선생. [이미지 제공 국가보훈처]

안경근 선생은 안중근 선생의 4촌으로 1896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1918년 국내에 가족을 모두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망명의 길을 떠나 종형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이미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박은식(朴殷植)·안정근(安定根)·신채호(申采浩)·이범윤(李範允) 등 애국지사들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혁명 러시아의 과도기적 혼란으로 인하여 자주독립운동에 어려움이 가중되자 상해로 이동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당시 임정 경무국장이었던 백범 김 구(金九)와 의기투합함으로써 그를 적극 보좌하면서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전력투구하였다.

1923년에는 동지들의 권유로 사천성(四川省)의 노주군관학교(瀘州軍官學校)에 입학, 이준식(李俊植)·문일민(文一民) 등과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1925년에는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마쳤으며, 그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권 회복 문제를 협의하였다. 선생은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가서 정의부(正義府) 군사부의 위원이 되어 사령장 김창환(金昌煥)의 참모로 들어가 독립투쟁에 종사하였다.

1929년에는 정의부,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 등 3부 통합운동에 심혈을 쏟았다. 독립운동 단체의 분산은 그만큼 독립투쟁의 역량을 저해·약화시킨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민족통합적 차원에서 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통합에 실패하고 남만주의 국민부(國民府), 북만주에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양립되었다. 이곳은 일제의 주구와 일본군 그리고 공산당이 포진하여 김좌진(金佐鎭)·오동진(吳東振)·김규식(金奎植)·김동삼(金東三) 등이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만주 일원에서의 독립투쟁이 불리해지고 압박도 받자 안전지대인 국제도시 상해(上海)로 돌아와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1930년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김 구·이동녕(李東寧) 등 임정 요인과 협의하고 황포군관학교(黃軍官學校)의 구대장(區隊長)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사의 투탄의거로 침체국면에서 허덕이던 임시정부는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가 개교하자 직접 학생 훈련을 담당하고 남경(南京) 등지에서 군관생도(軍官生徒) 모집에 주력하였다.

1933년 5월 선생은 상해 거주 한인교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혀 오던 일본총영사관 소속의 친일파 주구인 밀정 이종홍(李鍾洪)을 교살함으로써 한인들의 맺힌 한(恨)을 풀어 주었다.

이듬해에는 남경에서 애국단(愛國團) 조직에 참여하였다. 한편 동년 12월에는 한국독립군특무대(韓國獨立軍特務隊)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여 대장에 김 구, 참모장에 안공근(安恭根)을 선출하였으며, 선생은 군관학교 졸업생 등과 함께 대원이 되었다. 선생은 조국 독립을 위해 꼭 필요한 군사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 창설의 핵심 세력이 되어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4년에는 장개석(蔣介石)총통과 백범 김 구와의 연락 책임을 맡아 한·중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36년 11월 10일의 제29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황해도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에서 군사위원회를 조직(1937년 7월), 선생은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항일운동을 펼쳤다.

임시정부가 사천성(四川省) 기강현( 江縣)으로 이주한 후인 1939년 10월에 다시 의정원 의원으로 보선되어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약하다가 광복으로 귀국하였다.

2022년 6월의 독립운동가 이덕주 선생 재판 관련 기사. [이미지 제공 국가보훈처]
2022년 6월의 독립운동가 이덕주 선생 재판 관련 기사. [이미지 제공 국가보훈처]

 이덕주 선생은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20세에 조국 독립을 위해 단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교민단 산하 의경대, 상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 상해 한국독립당, 상해 한인청년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2년 3월,“조선총독을 처단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고 황해도 신천에 도착했다. 일본 경찰의 경계가 삼엄해 김구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 김구 선생은 유진식을 국내로 파견했다.

그러나 유진식과 함께 조선총독 처단 의거 준비를 하던 선생은 평소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수상히 여긴 신천경찰서 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던 중 조선총독 처단 계획이 발각되면서 의거는 불발됐다.

선생은 1932년 7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총포 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2022년 6월의 독립운동가 최흥식 선생. [이미지 제공 국가보훈처]
2022년 6월의 독립운동가 최흥식 선생. [이미지 제공 국가보훈처]

최흥식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20세에 “큰 포부와 위대한 뜻을 품고 죽음으로써 3천만 백성을 고통과 압박에서 구해낼 생각”을 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선생은 상해에 도착한 후, 윤봉길 의사가 취직했던 종품공사에서 1931년 12월부터 3개월 정도 근무하던 중, 한인애국단 숙소를 사용하면서 한인애국단과 인연이 시작됐다.

선생은 “1932년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리튼(Lytton) 조사단이 대련에서 현지 조사 일정이 있는 만큼,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대련에 있는 관동군 사령관, 남만주철도 총재 등 일제 고위 관료를 처단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았다. 리튼 조사단은 만주사변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국제연맹이 영국의 리튼을 위원장으로 하여 파견한 조사위원회를 말한다.

선생은 1932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 리튼 조사단 일행이 대련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확인, 대련으로 나오는 관동군 사령관과 남만주철도 총재를 유상근과 함께 처단하기로 했다. 만약 의거가 실패할 경우, 조사단이 대련을 떠나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5월 30일 오전 9시 두 번째 의거도 계획했다.

하지만, 선생이 대련의거 준비 과정에서 중국 상해로 보낸 전보를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이 의심하여 수취인(곽윤: 김구 선생이 편지 등을 통해 주요 정보를 주고받을 때 사용한 이름)을 확인한 뒤, 관동청에 발신인 체포를 요청하면서 거사일 이틀 전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 의거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선생은 대련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들 세 분의 선생은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특수정보를 수집하여 의열투쟁을 지원했고, 본인의 안위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린 분들이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안경근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덕주 선생은 1990년, 최흥식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