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 이준 열사 순국 115주년 범국민추모제 봉행
일성 이준 열사 순국 115주년 범국민추모제 봉행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2-07-12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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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유리 이준 열사 모역에서 7월 14일 오전 10시 30분 거행

(가칭)일성이준열사범국민추모회는 7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강북구 수유리 이준열사 묘역에서 일성(一醒) 이준열사 순국 115주년 범국민추모제를 개최한다.

이준열사순국115주년추모제봉행위원회와 재단법인 리준만국평화재단이 주관하여 열리는 일성(一醒) 이준열사 순국 115주년 범국민추모제는 제1부 제전행사, 제2부 추모제, 제3부 행진으로 진행된다.

오전 9시30분부터 진행하는 제1부 제전행사는 △ 이준열사가: 국가무형문화재 청강 정철호 작곡 성창순 창(유튜브 연결) 소개 △ 대한뉴스 제438호. <이준열사 유해 환국> - 대한뉴스 제478호. <위인을 추모> “조국과 민족을 위한 생명의 소리” <나각·중금연주> ( 백창기 천부문화대연합 선봉장) 등으로 진행된다.

검사 시절 이준 열사. [사진 제공 일성이준열사범국민추모회]
검사 시절 이준 열사. [사진 제공 일성이준열사범국민추모회]

제2부 추모제는 국민의례, 유족대표 인사말씀(조근송, 이준 열사 외증손자), 열사생애보고( 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에 이어 장호권 광복회 회장, 최재영 목사Rev.Choi Abraham,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 NK VISION2020대표, 김덕기(베델선생기념사업회 감사,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각 추모사를 한다. 하갑연 민족회의 공동대표가 ‘열사가 남기신 말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헌화 및 분향을 한다.

제3부 행진은 묘역에서 통일교육원까지 한다. 통일교육원 정문 앞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제창을 한다. 또한 일본의 독도 망언과 후쿠시마 핵오염수 무단방류 규탄를 하고 근현대사기념관 자유관람을 할 예정이다.

일성 이준 열사는 1858년 12월 18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중산리 발영동에서 부친 이병권(李秉權), 어머니 청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5년에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의 검사보를 거쳐 검사로서 관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1월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가두 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 민영환(閔泳煥)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양기탁(梁起鐸)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에 가담하였다. 1904년 일제가 러 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불법 상륙시켜 한국정부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가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는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에 가입하여 그 총무의 직책을 맡고 격렬한 반대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보안회의 회장은 송수만(宋秀晩), 부회장은 원세성(元世性)이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해산되자, 그 후속단체로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였다. 대한협동회의 회장은 이상설, 부회장은 이준, 총무는 정운복(鄭雲復), 평의장은 이상재, 서무부장은 이동휘, 지방부장은 양기탁, 재무부장은 허 위(許蔿) 등이었다. 대한협동회는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에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의 책임을 맡고 반(反)일진회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준을 6개월의 유배형(流配刑)으로 황해도 철도(鐵島)에 귀양보내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소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자, 이준은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동지들인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 이동녕(李東寧) 최재학(崔在學) 계명륙(桂明陸) 김인즙(金仁 ) 옥관빈(玉觀彬) 이승길(李承吉) 차병수(車炳修) 신상민(申尙敏) 김태연(金泰淵) 표영각(表永珏) 조성환(曺成煥) 서상팔(徐相八) 이항직(李恒稙) 이희간(李喜侃) 기산도(奇山濤) 김병헌(金炳憲) 유두환(柳斗煥) 김기홍(金基弘) 김 구(金九)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먼저 ‘을사늑약’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회 2회로 도끼를 메고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체포당하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기로 하였다. 제1회의 상소문을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두가 되고 다섯 명이 연명으로 서명하여 대한문 앞에 몰려가서 상소운동을 시작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상소운동을 탄압하려 하자 이준 등은 가두 연설을 하여 시민들과 함께 투석전을 하면서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일본군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탄압하고 이준 등 지도자 수십 명을 체포하였다.

국권회복운동이 장기전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이준은 1906년에 국민의 애국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또 이 목적을 전국 각 지방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하여 그의 고향인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 단체로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여 지도하였다. 또한 이 해에 일제의 완전식민지화를 저지하려면 국왕이 조약체결의 전제권을 갖지 않고 의회가 이를 심의하고 동의케하는 제도로 개혁해야 함을 주장하여 입헌제도의 연구와 개혁을 추진하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헌정연구회가 확대개편되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6~7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덕기 이회영(李會榮) 박(朴)상궁 등의 도움을 받아 황제 고종에게 이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서 ‘을사늑약’이 황제의 의사에 반하여 일제가 군사적 강압을 가하여 체결된 것으로 고종은 찬동한 바 없는 조약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였다. 고종이 이에 동의했으므로 극비리에 특사로서 정사(正使)에 이상설, 부사(副使)에 이 준과 이위종(李瑋鍾)이 임명되고 만국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가 준비되었다. 이상설은 이때 이미 망명하여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있고, 이위종은 주 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晋)의 아들로서 공사관의 2등참사관이 되어 페테르부르그에 있었다. 이준은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의 특사로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가 출발하기 직전인 4월초에 양기탁과 안창호(安昌浩)가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운동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었으므로 신민회에 가입했으나 곧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으므로 활동은 할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을 만나 특사 임명의 칙서를 전하고 함께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부르그로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특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특사는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약속받았다. 이준 등 세 특사는 1907년 6월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가 방해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하였다. 또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7월 9일 각국 신문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서 행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하였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특사의 활동에 협조적이었는데 비하여,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준은 이에 분개하여 통탄하다가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한편 일제 통감부는 궐석재판에서 이준에게 종신 징역을 선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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