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천이 피로 물들고 계곡마다 하얀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시체 썩은 물과 핏물이 계곡을 흐르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혹한 전란.”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에 기록한 임진왜란의 참상이다.

당시 조선인 100만 명 이상이 죽었으며, 이와 동시에 수많은 문화재와 함께 역사기록까지 불타 없어졌다. 1592(선조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가 모두 불타 없어졌음에도 선조 즉위 초 10년간의 기록을 되살릴 수 있던 것은 미암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 덕분이었다.

'담양 10정자' 중 연계정의 주인 미암 유희춘이 11년 간 기록한 미암일기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사료를 대신해 선조실록을 기록할 수 있었다. 미암일기를 를 보관하기 위해 후손이 만든 수장고 '모현관'. [사진=강나리 기자]
'담양 10정자' 중 연계정의 주인 미암 유희춘이 11년 간 기록한 미암일기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사료를 대신해 선조실록을 기록할 수 있었다. 미암일기를 를 보관하기 위해 후손이 만든 수장고 '모현관'. [사진=강나리 기자]

담양 10정자 중 ‘호남삼현湖南三賢’으로 불리는 대학자 유희춘이 지은 정자가 바로 전남 담양군 대곡면에 있는 연계정連溪亭이다. ‘연계連溪’는 그의 별호이며, 담양 대곡은 조선조 4대 여류 문인으로 손꼽히는 그의 아내 송덕봉의 고향, 즉 처향妻鄕이다.

연계정으로 가는 길은 슬로시티 창평마을에 있는 남극루에서 걸어서 50분 남짓, 자가용으로는 7분 정도로 가깝다. 마을 뒷산이 노루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노룻골’로 불리는 대곡면은 고려말 정승을 지낸 채문무가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있어 고려때 이미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마을로 들어서니 연계정보다 먼저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나이가 수백 년 된 노거수가 둘러싼 연못, 연지蓮池와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모현관慕賢館’이다. 유럽의 동화에 나올 듯한 모습인 모현관은 미암일기와 미암집 목판 등 16~19세기 조선 고문서를 보관한 수장고 역할을 해왔다. 미암 선생의 후손이 1957년 6.25 전쟁 후 혼란기에 취약했던 화재와 도난을 막기 위해 연지 한가운데 세우고 건물 뒤편에 작은 다리를 놓았다.

연계정을 오르는 작은 언덕을 가득 메운 붉은 꽃무릇이 가을을 맞아 지고 있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연계정을 오르는 작은 언덕을 가득 메운 붉은 꽃무릇이 가을을 맞아 지고 있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연지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니 가을이라 연꽃은 없고 얼기설기 뿌리만 보였는데, 연꽃이 핀 계절에 본다면 더욱 환상적이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연지 둘레에는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큰 규모로 조성된 미암박물관, 선산 유씨 미암 종가의 며느리가 지키는 미암세가, 그리고 독특하게도 벽화가 그려진 미암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연지에서 왼쪽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연계정은 강렬한 붉은빛 폭죽처럼 꽃을 피우는 꽃무릇이 뒤덮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한여름에 찾아왔다면 붉은 융단 끝자락에 정자가 올라앉은 모습이었으리라.

붉은 꽃무릇 언덕 위에 자리잡은 연계정. [사진=강나리 기자]
붉은 꽃무릇 언덕 위에 자리잡은 연계정. [사진=강나리 기자]

연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형태로, 정면에서 왼쪽은 마루로, 중앙과 오른쪽 2칸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서 유희춘 선생이 후학을 길렀다. 정자의 주인 유희춘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을 키워낸 인물로도 유명하다.

유희춘은 해남에서 태어났고, 중종 3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면서 수찬修撰, 사간언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그러나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왕실 외척인 대윤과 소윤 간 치열한 정권다툼으로 인해 일어난 을사사화에 휘말려 제주도 등에서 19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연계정으로 오르는 계단에 쌀알크기의 꽃망울을 터트린 '쥐꼬리망초 꽃'. [사진=강나리 기자]
연계정으로 오르는 계단에 쌀알크기의 꽃망울을 터트린 '쥐꼬리망초 꽃'. [사진=강나리 기자]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오랜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부제학, 전라감사 등 고위 관직을 지냈고, 예조와 형조, 이조 등 참판을 지내다 사직했다. 연계정에 머물던 유희춘은 1577년 선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해 입궁을 기다리던 중 65세에 사망했다.

‘16세기 타임캡슐’로 불린 《미암일기》는 선조 즉위년인 1567년 10월, 그의 나이 55세부터 사망하기 이틀 전인 1577년 5월 13일까지 1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적어 내려간 일기였다.

그 속에는 미암 선생의 개인 일상부터 국정의 대요(大要, 간략한 줄거리), 인물의 진퇴(進退, 직위나 자리에 머물거나 물러남) 등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풍속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런 풍부한 정보가 전란 후 역사를 복원하는 중요 사료로 활용될 만큼 가치가 있었다. 미암일기는 ‘기록의 나라’ 조선에서 끊길 뻔한 역사기록을 잇는 다리가 되어주었다.

연계정 뒷편은 굵직한 참죽이 하늘 높이 뻗어 올라 대숲을 이루고 있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연계정 뒷편은 굵직한 참죽이 하늘 높이 뻗어 올라 대숲을 이루고 있었다. [사진=강나리 기자]

정자 뒤편으로 돌아가니 길쭉길쭉하게 하늘로 뻗어 오른 참죽(왕대나무)이 담담한 초록빛으로 숲을 이루었다. 정자 앞쪽 툇마루에 앉아 내려다보니 온통 푸른 산에 둘러싸인 연지와 모현관이 한눈에 보인다.

툇마루에서 유희춘이 50대 중반부터 매일 매일 꼼꼼히 기록한 심정을 한번 헤아려 보았다. 자신의 일상만 적었다면 그냥 평범한 일기였을 텐데, 마치 뉴스를 기록하듯 써 내려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 시대 당시로서 이미 노년에 접어든 그는 후학들에게 자신이 사는 오늘을 기록해 역사로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연계정 현판과 방문, 지붕 아래 들어열림문(분합문)을 걸 수 있게 된 걸쇠 등이 보인다. [사진=강나리 기자]
연계정 현판과 방문, 지붕 아래 들어열림문(분합문)을 걸 수 있게 된 걸쇠 등이 보인다. [사진=강나리 기자]

상념을 접고 다시 연지쪽으로 내려와 미암세가로 들어서니 안쪽에 미암 선생을 모신 미암사당이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미암사당 정면 위쪽에는 가로 6자, 세로 2자 크기로 왼쪽부터 백학도와 등룡도, 봉황도가 그려져 있다. 불교 건축물과 달리 유교적 건축물에는 벽화를 그리는 일이 없는데, 매우 드물게 벽화가 그려져 있어 희귀성과 상징미가 뛰어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미암사당 바로 인근에 미암 선생의 14대 종부인 노혜남 어르신이 홀로 미암세가를 지키고 있었다. 연세를 여쭈니 “경오생”이라고 답했는데 헤아려 보니 92세였다. 어르신은 미암세가의 종부가 되면서 수많은 제사를 지낸 일화를 들려주었다.

(위) 미암세가 14대 종부 노혜남 어르신(왼쪽)과 미암사당 외관. (아래) 미암사당에는 유교적 건물에서는 매우 드물게 벽화가 있다. 왼쪽부터 백학도, 등룡도, 봉황도. [사진=강나리 기자]
(위) 미암세가 14대 종부 노혜남 어르신(왼쪽)과 미암사당 외관. (아래) 미암사당에는 유교적 건물에서는 매우 드물게 벽화가 있다. 왼쪽부터 백학도, 등룡도, 봉황도. [사진=강나리 기자]

“시집오기 전에는 제사를 지낸 적이 없어서 젯상에 오르는 음식이 따로 있는 줄 몰랐어. 처음 시집와서 얌전하게 나물을 무쳐 담았는데 안 된다고 해서 깜짝 놀랐지.(허허) 위로 5대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니 열 번 하고, 추석과 설 명절 등 열 세 번 정도 제사를 지냈어. 지금은 통합해서 1년에 4~5번만 지내지.” 오랜만에 찾은 객에게 간식과 함께 정을 나누어 주었다.

연계정을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담양공용버스터미널에서 농어촌버스 4-1, 4-2, 4-3, 4-4를 타고, 장동 정류장까지 1시간~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창평마을에서 도보로 남극루, 연계정, 상월정은 5분~1시간 내외로 걸을 만하다. 다음은 고려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냈던 서은 전신민 장군의 충절로 유명한 ‘독수정獨守亭’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