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집은 외부로부터 사적인 공간을 차단하기 위해 벽으로 둘러막는 형식인 반면, 우리 한옥은 창과 방문, 대청마루를 통해 밖을 내다보며 주변 산수를 끌어안는 형식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지형과 방위를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해 판단하는 ‘풍수지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집이나 정자 등 사람이 머무는 곳은 햇볕을 받아들이기 좋은 남향 또는 동남향이 대부분이고, 북향인 경우는 거의 없다.

남쪽에서 바라본 독수정의 모습. 독수정은 담양 10정자 중 유일한 북향 정자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남쪽에서 바라본 독수정의 모습. 독수정은 담양 10정자 중 유일한 북향 정자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그러나 담양 10정자 중 ‘독수정獨守亭’은 유일한 북향 정자이다. 독수정을 찾는 길은 정자의 주인이 품은 망국亡國의 한과 북향 정자의 이유를 알아가는 길이 되었다. 독수정은 담양군 남면 연천리에 있으며, 담양 10정자 중 가장 유명한 ‘소쇄원’에서 걸어서 30분, 인근 ‘식영정’에서는 45분 거리에 있다.

독수정의 정식명칭은 ‘독수정 원림園林’으로, 원림은 집터에 딸린 숲을 일컫는다. 정자 주변에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살구나무, 매화 등이 둘러싸고 있어 고려 시대 산수 원림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정자의 현판 앞으로는 무성한 대나무들이 터널처럼 뚫린 대나무 숲길이 마을로 길게 이어져 있다. 지금의 독수정은 1972년 허물고 새로 지은 것이다.

독수정 원림으로 가는 길.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펼쳐져 있다. 왼쪽 느티나무 아래는 이곳이 구한말 의병전적지임을 나타내는 작은 비가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독수정 원림으로 가는 길.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펼쳐져 있다. 왼쪽 느티나무 아래는 이곳이 구한말 의병전적지임을 나타내는 작은 비가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독수정 주변은 회화나무, 느티나무, 살구나무, 매화 등이 둘러싸 고려시대 산수 원림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사진=강나리 기자]
독수정 주변은 회화나무, 느티나무, 살구나무, 매화 등이 둘러싸 고려시대 산수 원림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사진=강나리 기자]

정자 아래는 붉게 타오르는 꽃무릇이 둔덕을 이루고 있어, 앞서 다녀온 연계정과 마찬가지로 8월경에 왔다면 붉은 구름 위에 떠 있는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꽃무릇 둔덕에서 곧장 오르는 시멘트 계단은 주변 풍광과 어울리지 않아 눈살이 찌푸려졌다. 면앙정과 송강정, 식영정 모두 돌계단으로 길을 내어 틈새로 들꽃이 피었는데, 유독 독수정만은 그렇지 못했다. 이왕이면 독수정의 오른쪽에 나있는 완만한 길을 오르는 것이 좋겠다.

독수정 아래는 붉은 꽃무릇 둔덕이 있다. 한여름에 찾아오면 붉은 구름 위에 자리 잡은 정자를 볼 수 있을 듯 하다. [사진=강나리 기자]
독수정 아래는 붉은 꽃무릇 둔덕이 있다. 한여름에 찾아오면 붉은 구름 위에 자리 잡은 정자를 볼 수 있을 듯 하다. [사진=강나리 기자]

씁쓸한 마음을 안고 독수정을 오르니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의 팔작지붕의 정자에 방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독수정 현판과 함께 지붕 밑에는 전신민이 지은 독수정원운獨守亭原韻, 독수정의 풍광을 읊은 독수14경이 조금 조악한 액자에 담겨 걸려있었다.

정자 주변을 둘러보니 때는 가을로 접어든 9월 하순이라 아직 늦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였음에도 유난히 서늘하고 쓸쓸했다. 담양 10정자 대부분이 고즈넉하면서도 아늑한 느낌과 달리 북향을 한 독수정은 외로운 느낌이 강하게 드는 정자였다.

독수정을 오르는 길은 꽃무릇 둔덕 가운데 난 계단보다 오른쪽으로 난 완만한 경사길이 낫다. [사진=강나리 기자]
독수정을 오르는 길은 꽃무릇 둔덕 가운데 난 계단보다 오른쪽으로 난 완만한 경사길이 낫다. [사진=강나리 기자]

이 정자의 주인은 고려 공민왕 때 병부상서(지금의 국방부장관)을 지낸 서은瑞隱 전신민 장군이다.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와 절친한 벗이었던 그는 속수무책으로 망해가는 고려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호인 서은瑞隱은 서석산에 숨었다는 뜻이며, 자신을 ‘미사둔신(未死遁臣 죽지 못하고 달아난 신하)’라 칭했다 한다.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유신 72현은 태조의 출사 요구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골짜기 두문동으로 들어가 은거했고, 이때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전신민 또한 벼슬을 버리고 멀리 전남 담양에 은거하여 독수정을 짓고 아침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향해 절하며 충절을 다졌다. 그의 심정이 독수정원운 시귀절에 담겼다.

“바람과 티끌은 아득하고 나의 감회는 깊은데/ 어느 깊숙한 골짜기에 이 늙은 몸을 붙여둘까/ 천리밖 강호에서 두 귀밑머리는 흰 눈빛이 되고/ 백년 가까운 세월에 슬픔만 남아있네/ 왕손과 꽃다운 풀은 봄의 한이 서렸고/ 두견새는 꽃가지에서 달을 보고 우누나/ 바로 이 곳에 뼈를 묻히려고/ 나 혼자 지키며 이 집을 얽었다네” -전신민의 ‘독수정원운 1’

(위) '홀로 지킨다'는 뜻을 지닌 독수정 현판. (중앙, 아래) 독수정의 풍광을 노래한 시들. [사진=강나리 기자]
(위) '홀로 지킨다'는 뜻을 지닌 독수정 현판. (중앙, 아래) 독수정의 풍광을 노래한 시들. [사진=강나리 기자]

‘홀로 지킨다’는 뜻을 가진 정자의 이름 ‘독수獨守’는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시에서 연유했다. “백이와 숙제는 누구인가? 스스로의 뜻을 지키다 서산(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네 (夷濟是何人 獨守西山餓 이제시하인 독수서산아).” 백이와 숙제는 전설적인 형제 성인으로, 본래 은나라 고죽국의 왕자들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고 나라를 떠났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자 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문관에게도 망국의 통한은 크지만, 무관이었던 전신민에게 자신이 지켜내지 못하고 끝내 망해버린 나라, 고려는 깊은 회한으로 남았나보다. 고집스럽게 북쪽을 향한 정자, 독수정. 그리고 정자를 둘러싼 서늘한 기운이 그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독수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정자로 가운데 방이 있다. 독수정의 이모저모. [사진=강나리 기자]
독수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정자이다. 독수정 곳곳의 모습. [사진=강나리 기자]

대숲을 따라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온통 초록빛으로 에워싸고, 기온은 추위가 느껴질 정도였다. 여름과 가을에 이곳을 찾는다면 산모기에 대한 예방을 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독수정을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담양여객터미널에서 좌석버스 311 또는 311-2를 타고 문흥지구입구 남쪽에서 내려 농어촌버스 2-1, 2-2를 타고 연천정류장에 내리면 된다. 광주광역시 말바우시장에서는 충효187번 버스 또는 농어촌 2-1, 2-2 등 버스를 타면 한번에 연천정류장까지 도착해 더 빠른 편이다.

담양 10정자를 도보로 여행한다면 식영정과 소쇄원, 독수정이 가까워 함께 둘러보기에 적절하고, 식영정에서 명옥헌까지는 도보로 1시간 30분 거리이다. 한편, 송강정과 면앙정, 관어정이 각각 1시간 내외 거리를 두고 자리잡고 있으며, 남극루와 연계정, 그리고 상월정이 도보 길로 이어져 있다. 다음은 그림자도 쉬어 간다는 식영정息影亭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