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옥헌원림鳴玉軒園林은 담양 10정자 중 배롱나무에서 핀 붉은 백일홍이 장관을 이루는 아름다운 정자로,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에 있다.

조그마한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이 바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구슬이 부딪히는 듯하다고 하여 울 명(鳴), 옥구슬 옥(玉)의 이름을 가진 명옥헌원림은 고즈넉한 마을 길을 따라 굽이굽이 걸어 들어가야 나온다.

명옥헌의 한여름 풍경. 네모난 연못 한 가운데 둥근 섬, 그리고 주변은 온통 배롱나무에 핀 붉은 백일홍 천지이다. 살짝 지붕이 보이는 것이 명옥헌이다. [사진=담양군청]
명옥헌의 한여름 풍경. 네모난 연못 한 가운데 둥근 섬, 그리고 주변은 온통 배롱나무에 핀 붉은 백일홍 천지이다. 살짝 지붕이 보이는 것이 명옥헌이다. [사진=담양군청]

정자 초입에 넓고 푸른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네모난 연못 한가운데는 거목의 배롱나무를 품은 둥근 작은 섬이 눈길을 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당시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표현한 방지원도方地圓島형 연못이다.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우리 민족의 천지인天地人사상을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 그리고 그 자연을 바라보는 주체인 인간이 어우러져 완전함을 이루는 것이다.

명옥헌을 방문한 당시는 태풍 ‘장미’가 휩쓸고 지나간 바로 다음이라 연못 물이 온통 진흙 빛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 아름다운 시간에 보기가 쉽지 않았다.

명옥헌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 2020년 태풍 '장미'가 지난 후라 연못 물이 온통 진흙 빛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명옥헌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 2020년 태풍 '장미'가 지난 후라 연못 물이 온통 진흙 빛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7월과 8월의 맑은 날에 명옥헌을 찾으면 푸른 하늘과 구름, 정자를 둘러싼 산이 그대로 비치고, 주위를 둘러싼 배롱나무에서 핀 붉은 백일홍 꽃잎이 넘실넘실 물결을 따라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정자로 향하는 길은 300년 넘은 배롱나무 가지가 아치를 이루며 붉은 꽃길을 내어 레드카펫과도 같다. 배롱나무의 가지는 마치 잘 발달한 잔근육처럼 독특한 결을 지녀 그 자체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낸다.

마을 주민은 “나이 어린 배롱나무가 먼저 잔망스럽게 예쁜 꽃을 피우고, 오랜 세월을 겪은 배롱나무는 좀 더 늦게 꽃을 피운다. 하지만 나이 많은 배롱나무가 온 산 가득 꽃을 피우면 그 장관은 따를 바가 없다.”라고 했다.

명옥헌 연못에 담긴 하늘과 주변 산수. 백일홍 붉은 꽃잎이 물결따리 넘실거린다. [사진=담양군청]
명옥헌 연못에 담긴 하늘과 주변 산수. 백일홍 붉은 꽃잎이 물결따리 넘실거린다. 지난 해 연못에 연꽃을 심어 올해 여름에는 연잎과 연꽃에 가려 장관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사진=담양군청]

명옥헌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활짝 펼쳤고, 조금 길게 뻗은 지붕을 받치기 위해 보조 기둥, ‘활주’가 설치되어 있다. 그 중앙에 자리한 온돌방을 중심으로 사방둘레에 대청마루가 있는데, 방에서 창과 문을 열면 동서남북 사방의 풍광을 모두 두 눈에 담을 수 있어 그야말로 ‘4경景 정자’라 할 수 있다.

명옥헌은 독특하게도 큰 기둥마다 서로 다른 시대에 활동한 작가의 한시漢詩가 검은색 주련柱聯으로 10판이 걸려 있다.

명옥헌은 중앙에 온돌방이 있고 사방에 마루를 깔아 방문과 창을 활짝 열면 주위 사방 풍광을 모두 볼 수 있는 '4경 정자'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명옥헌은 중앙에 온돌방이 있고 사방에 마루를 깔아 방문과 창을 활짝 열면 주위 사방 풍광을 모두 볼 수 있는 '4경 정자'이다. 명옥헌의 기둥마다 한시를 적은 검은색 주련이 걸려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고려 인종 때 문신인 이지저李之氐를 비롯해 조선 중기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왜적에 끌려가 일본 성리학의 출발에 영향을 끼친 강항姜沆과 그가 왜에 체류할 때 제자였던 왜승 순수좌舜首座, ‘김삿갓’으로 불리던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 조선 말 여류시인 박죽서朴竹西가 있다.

또한, 동학혁명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의 절명시 일부도 있고, 청나라 말기 정치가인 원세개袁世凱가 쓴 시도 있으며, 작자 미상의 한시도 있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여 주련을 걸었는지 전하는 바는 없다.

그중 여류시인 박죽서의 ‘제야(除夜, 섣달 그믐날 밤)’ 중 일부로, “오랜 세월 동안 지난 일은 헛된 꿈과 같으니/ 인생은 나도 모르는 사이 늙어만 가네. (만고소마응시몽萬古消磨應是夢/ 인생노재부지중人生老在不知中)”가 있다. 

또한, 청나라 원세개가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여 지은 만시輓詩는 “몸은 비록 한국에 있으나 명성은 세계만방에 떨치네/ 살아서는 백 년을 못사는데 죽어서 천년을 가네. (신재삼한명만국身在三韓名萬國/생무백세사천추生無百歲死千秋)”이다.

(위) '명옥헌 계축'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그의 제자 오기석을 아껴 계축년에 '명옥헌'이란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 글을 바위에 새긴 것을 탁본해 만든 것이라 전한다. (아래) 현판 '삼고'는 명옥헌의 주인 오희도의 일화와 유비, 제갈량의 일화인 '삼고초려'를 빗댄 것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위) '명옥헌 계축'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그의 제자 오기석을 아껴 계축년에 '명옥헌'이란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 글을 바위에 새긴 것을 탁본해 만든 것이라 전한다. (아래) 현판 '삼고'는 명옥헌의 주인 오희도의 일화와 유비, 제갈량의 일화인 '삼고초려'를 빗댄 것이다. [사진=강나리 기자]

명옥헌의 주인은 조선 시대 예문관 관원과 검열 등을 역임한 문신, 명곡 오희도(1583~1623)와 이곳에서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37세에 요절한 그의 넷째아들 오이정(1619~1655)이다.

정자 앞 오른편에 서 있는 ‘명곡오선생유적비明谷吳先生遺蹟碑’와 명옥헌 안에 걸린 ‘삼고三顧’라는 현판이 바로 오희도의 흔적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성인의 그릇이었다고 한다. 광해군 때 담양에 칩거하여 두문불출한 지 10년이 된 오희도를 찾은 것은 반정을 준비하던 능양군(훗날 인조)이었다. 능양군은 광해군을 축출하고자 동조 세력을 모으는 과정에서 오희도를 세 차례나 찾았으나 매번 거절했다.

명옥헌 앞 오른편에 선 '명곡오선생유적비'. [사진=강나리 기자]
명옥헌 앞 오른편에 선 '명곡오선생유적비'. [사진=강나리 기자]

능양군이 찾아올 때마다 시냇가 오동나무와 명옥헌 인근 은행나무에 말고삐를 매었는데, 마지막 거절 이후 오희도는 말고삐를 맨 흔적을 보며 마음을 바꿨다.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일이 있겠다'는 결심으로 반정에 참여했다고 전한다. 반정성공 후 인조가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오희도는 이를 거절하고 과거에 응시해 출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조 1년 그는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명옥헌이란 정자의 이름은 자그마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구슬과 같다고 하여 지어졌다. [사진=강나리 기자]
명옥헌이란 정자의 이름은 자그마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구슬과 같다고 하여 지어졌다. [사진=강나리 기자]

현판 ‘삼고’는 촉한의 유비가 제갈량을 얻으려 그의 초가집을 세 번 찾은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빗대어 조선의 삼고초려를 뜻한다. 한편, 명옥헌 인근에는 ‘인조대왕 계마행 仁祖大王 繫馬杏’이라 하여, 능양군 시절 말고삐를 매었던 은행나무가 지금도 존재한다.

명옥헌원림을 가려면 담양여객버스터미널에서 농어촌버스 4-1, 4-2, 4-4를 타고 연동(담양) 정류장에서 내려 도보로 15분 걸으면 된다. 다음은 담양군 수북면 나산리의 연꽃 연못 한가운데 서 있는 ‘관어정觀漁亭’으로 가자.

[참고] 호남기록문화유산-명옥헌 주련 및 인조대왕 계마행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