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수없이 불러온 애국가의 첫 구절, 환웅이 내려와 한민족의 시작을 알린 곳. 봉오동, 청산리 등 독립군 전사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민족의 산, 백두산이다. 그런 뜻깊은 장소에 가게 된다니 얼마나 설레던지.

울창한 삼림과 굽이굽이 올라가는 길을 보니 과연 이곳이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유격전술의 최적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이 험지를 뛰어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바위 하나까지도 독립전사들의 피땀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냥 보아지지 않았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 연길에서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기 위해 매표소로 향했다. 많은 사람이 백두산을 찾는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백두산으로 가는 길. 연길에서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기 위해 매표소로 향했다. 많은 사람이 백두산을 찾는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해발 2,700미터나 되는 백두산 천지의 날씨는 변화무쌍하기로 유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산 아래는 푹푹 찌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천지는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천지에 도착하니 비바람이 불고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실망스런 마음으로 천지에 다가가니 잠깐 사이에 천지의 구름이 걷히며 그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그렇게 부는데도 천지는 마치 거울처럼 고요한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감격에 겨워 목소리가 높아지고 심장이 떨렸다.

『삼일신고』 천궁훈에 천궁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땅과 사람에게도 있는데 천궁이 땅에 있는 것이 백두산이요, 사람에 있는 것이 뇌라고 했다. 백두산에 서서 하늘을 우러르니 마치 하늘과 백두산과 나의 뇌가 연결되며 삼천궁이 하나가 되는 순간인 듯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일행 모두 얼굴이 마치 아이와 같은 함박웃음을 짓고 생기 있는 탄성을 지르며 빗속에서 기뻐하였다. 대자연 앞에서 민족애의 뜨거움을 가슴에 느끼며 맛보는 환희심. 그 순간 우리는 천궁에 있었다.

백두산 천지. 해발 2,700미터나 되는 백두산 천지의 날씨는 변화무쌍하기로 유명하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백두산 천지. 해발 2,700미터나 되는 백두산 천지의 날씨는 변화무쌍하기로 유명하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백두산에서 보아야 할 것은 천지뿐 아니라 장백폭포도 있다. 장백폭포는 원래 이름이 비룡폭포이다. 중국에서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면서 장백폭포로 알려졌는데 왠지 일부러라도 비룡폭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다. 백두산 답사는 무척 감격적이었지만 내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이곳이 중국 땅이라는 것이었다. 백두산 입구에서는 일일이 여권검사까지 하면서 내 나라 대한민국의 영토가 아니라는 것을 각성시켜 주었고 마치 기차처럼 줄지어 오르내리는 하얀 중국 승합차는 백두산에서 얼마나 많은 수익을 중국이 벌어들일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현재 백두산은 54.5%가 북한, 45.5%가 중국의 영토로 갈라져있다. 이것은 1962년 중국 주은래 총리와 북한 김일성 수상이 체결한 ‘북중 국경조약’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2003년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비룡폭포. 백두산에서 보아야 할 것은 천지뿐 아니라 비룡폭도도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비룡폭포. 백두산에서 보아야 할 것은 천지뿐 아니라 비룡폭도도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비룡폭포는 천지와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화산재가 흘러내려 초목과 검은 화산재가 어우러진 모습은 지구라는 별을 느끼게 해주었다. 얼마 전 비가 와서인지 폭포수는 더욱 힘차게 떨어져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이고 신비로운 지구인가. 순간 중국도 북한도 한국도 구분 짓지 않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탄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위대한 자연 앞에서 우리는 다 같은 지구인일 뿐인데 세상은 너무 많은 분열에 아파하고 있다.

해질 무렵 대종교 3종사묘역에 도착했다. 대종교 3종사 묘역은 연변 화룡시 청파호 언덕에 있는데 묘역 내에는 화룡시인민정부에서 1991년에 세운 ‘반일지사무덤’이라는 이름의 문화유물 지정비가 서 있다. 3종사란 대종교 제1세 교주 홍암 나철 대종사, 제2세 교주 무원 김교헌 종사, 그리고 백포 서일 종사를 말한다. 대종교는 1909년 홍암 나철이 중광한 민족고유의 종교로 단군을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키우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박은식, 신채호,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홍범도, 이상설, 주시경, 김두봉, 신규식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대종교가 독립운동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종교 3종사 묘역은 연변 화룡시 청파호 언덕에 있는데 묘역 내에는 화룡시인민정부에서 1991년에 세운 ‘반일지사무덤’이라는 이름의 문화유물 지정비가 서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대종교 3종사 묘역은 연변 화룡시 청파호 언덕에 있는데 묘역 내에는 화룡시인민정부에서 1991년에 세운 ‘반일지사무덤’이라는 이름의 문화유물 지정비가 서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홍암나철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었으나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사임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일본에서 외교 노력도 해보았고, 을사오적 암살단을 만들어 실행에 옮겼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단군을 중심으로 민족정신을 지키고 실력을 양성하는 데 매진하고자 단군교를 중광하고 대종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1915년 일제는 대종교의 세력이 확장되고 민족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경계하여 대종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하고 포교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저항하고자 나철은 평양의 구월산에서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결했다. 대종교인들은 나철의 유해를 구월산에서부터 경성, 원산, 나진으로 몇 개월에 걸쳐 모시면서 최종 이곳 화룡현 청파호에 안장했다. 청파호는 나철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지역으로 활동근거지를 옮기면서 정착한 곳으로 의미가 큰 지역이다. 1912년에는 이곳에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천진궁을 세우고 3박4일 동안이나 개천절 행사를 열어 중국인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이렇게 대표적인 대종교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홍암 나철의 유해를 모신 것이다.

대종교 3종사 묘역. 3종사는 대종교 제1세 교주 홍암 나철 대종사, 제2세 교주 무원 김교헌 종사, 그리고 백포 서일 종사를 말한다.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대종교 3종사 묘역. 3종사는 대종교 제1세 교주 홍암 나철 대종사, 제2세 교주 무원 김교헌 종사, 그리고 백포 서일 종사를 말한다.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함께 모신 김교헌은 조선왕가의 명문가 후손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내려온 말죽거리의 50만평 땅과 조계사 터의 340칸에 달하는 저택을 팔아 독립운동에 바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배달민족사를 찾는 역사서를 저술하여 사대주의사상에서 벗어나고 민족주체사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민족사학자 박은식, 신채호와 최남선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이다. 나철 사후 2대 교주가 되어 교단을 정비하고 교세를 확장하여 신자수가 30만 명에 이르렀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 이전에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하는 데 앞장섰다. 1920년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교주로서 큰 역할을 했다. 1923년 윤세복에게 교주의 지위를 물려주고 56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백포 서일은 대종교 입교 후 뛰어난 지도력으로 많은 교우를 얻어 교세확장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하며 무기를 구입하고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고 1919년에는 대종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북로군정서군을 만들어 총재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곳 3종사묘역에 화룡시 인민정부가 세워 놓은 소개비에도 서일이 주도한 무장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청산리전투이후 일제는 독립군을 지원해준 조선인에 대한 보복으로 화룡현을 포함해 횡도천, 명동촌 등 조선인 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곳 화룡현의 조선인 마을은 모두 불타고 조선인들을 잔학한 방법으로 죽여 독립군을 지원하는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다.  이후 독립운동의 재기를 위해 러시아의 자유시로 간  독립군들은 자유시참변때 서로에게 총을 겨누어 큰 희생을 치르게 된다. 한편 자유시로 가지않았던 서일은 밀산 당백진에서 둔병제를 실시하며 대일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적의 습격으로 한인들이 살해당하고 마을이 불타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21년 자결하였다.

자랑스러운 청산리전투의 승리도 있지만 가슴 아픈 일제의 보복도 있는 항일투쟁사이다. 대종교 3종사 묘역은 백두산을 바라보고 있다. 백두산은 우리민족의 지리적, 정신적 중심지로 우리의 근원을 잊지 않게 해주는 존재이고 우리의 고토이다. 대종교 독립운동가들은 백두산을 근원으로 하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중화사상에서 벗어나고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힘을 길렀다. 그들의 행적을 배우며 우리도 통일을 이루어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펼치는 당당한 한민족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