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서울지방보훈청이 후원하는 현충시설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을 매주 한다. 이 사업의 마지막 주말 탐방지는 9월 28일 안국역 일대에 있는 천도교 관련 현충시설이었다. 천도교는 교주인 손병희가 대표로 하여 기독교, 불교계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다. 특히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더욱 뜻깊은 현충시설탐방이었다.

현충시설로 지정된 천도교 중앙대교당.  천도교는 1918년 건립을 추진할 당시 모금한 교당 건축비 중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중앙대교당은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붉은 벽돌의 외관에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현충시설로 지정된 천도교 중앙대교당. 천도교는 1918년 건립을 추진할 당시 모금한 교당 건축비 중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중앙대교당은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붉은 벽돌의 외관에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천도교는 1860년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서 비롯되었는데 1905년 동학의 3대 교주였던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칭한 민족종교이다.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의 인내천 사상으로 인간평등, 인간존중 정신이 불평등과 억압의 시대에 급속히 확산되어 큰 교단을 이루었다.

첫 번째 현충시설은 천도교중앙대교당이다. 1918년 건립을 추진할 당시 모금한 교당 건축비 중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임시정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대고 심지어는 다른 교단인 기독교 지도자에게도 성금을 보내는 등 3·1운동의 배후에는 이 천도교의 힘이 있었다. 중앙대교당은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붉은 벽돌의 외관에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내부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어 공간이 넓어 약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어 1920~30년대 다양한 집회를 여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내부에 기둥이 없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천 여명을 수용할 수 있어 1920~30년대 다양한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내부에 기둥이 없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천 여명을 수용할 수 있어 1920~30년대 다양한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1945년 광복을 맞아 국내로 환국한 김구 선생은 어디로 가서 임시정부가 돌아왔다고 고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맨 먼저 이곳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찾아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고,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도 없었을 것이외다.”라고 연설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앞에서 현충시설 답사에 참가한 학생들이 3.1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천도교 중앙대교당 앞에서 현충시설 답사에 참가한 학생들이 3.1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바로 옆에 있는 수운회관은 지금은 15층의 현대식 빌딩이지만 당시에는 천도교 소년회 사무소 터로 이곳 역시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원래 있던 붉은 벽돌의 중앙총부 건물은 1958년에 강북구 우이동의 봉황각 옆으로 이전하였다. 수운회관 자리에 있었던 천도교 중앙총부건물에는 사무실을 비롯해 출판사인 개벽사, 천도교 청년당, 여성회, 소년회 등이 입주해 있었다. 이것은 천도교가 남녀노소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실천종교임을 보여준다.

현충시설 수운회관. 수운회관은 지금은 15층의 현대식 빌딩이지만 당시에는 천도교 소년회 사무소 터로 이곳 역시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현충시설 수운회관. 수운회관은 지금은 15층의 현대식 빌딩이지만 당시에는 천도교 소년회 사무소 터로 이곳 역시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천도교 소년회는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정하고 어린이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해 나갔다. 어린이 운동의 창시자 소파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위였다. 비록 나라를 빼앗긴 상태이지만 우리 민족의 희망인 어린이를 잘 교육하여 미래를 준비하자고 하였다.

세 번째 현충시설은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로 현재 덕성여중 자리이다. 1910년에 2층 건물로 세워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건립하기 이전인 1921년까지 사용하였다. 중앙총부는 이곳에서 종교계 지도자가 모여 3·1운동을 계획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에서 3.1운동에 관해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에서 3.1운동에 관해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3·1운동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 운동을 실현한 천도교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예로부터 하늘을 섬긴 민족, 그 하늘이 이미 모든 인간에게 내려와 있다는 큰 깨달음의 철학을 가진 민족,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개혁하고자 했던 동학과 천도교의 전통을 우리는 잊고 살았다. 3·1운동이라는 세계사적인 사건은 그냥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정신,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 공동체를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의 가치라는 정신을 가진 우리 민족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보이는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비 앞에서 소파 방정환에 관해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보이는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비 앞에서 소파 방정환에 관해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

역사는 기억하는 자들의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우리의 역사와 철학을 알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더욱 정의로운 나라,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