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나철기념사업회(회장 박오체)는 11월 19일 홍암 나철 선생 순국 제103주기 추모제를 나철 선생의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 홍암나철선생기념관에서 개최한다.이날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임원과 회원을 비롯하여 군민 등 200여명이 참석해 나철 선생을 추모한다. 추모제는 국민의례에 이어 초혼비 제막, 살풀이 공연, 약사보고, 경과보고, 헌화 및 분향, 추모사, 폐식 순으로 진행한다.

홍암 나철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인영(寅永)이고 호는 홍암(弘巖), 또는 경전(經田)이라 하였다. 대종교에서 펴낸 '중광60년사'를 참고하면, 일찍이 국문을 해득한 나철은 10세에 호남의 유명한 한학자이자 술서(術書)에도 밝은 왕석보(王錫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0세가 되자 나철은 대망을 품고 서울로 상경해 남산 시회에서 재능을 발휘하여 운양 김윤식의 집에 머물게 된다.

홍암 나철. 홍암나철기념사업회는 11월 19일 홍암 나철 선생 순국 제103주기 추모제를 나철 선생의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 홍암나철선생기념관에서 개최한다. [사진=보성군]
홍암 나철. 홍암나철기념사업회는 11월 19일 홍암 나철 선생 순국 제103주기 추모제를 나철 선생의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 홍암나철선생기념관에서 개최한다. [사진=보성군]

 

 

29세 때(1891. 10. 1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사정(兵曹司正) 승문원부정자를 지내다가 스스로 낙향하였다. 1895년 5월 12일 징세서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나철은 1898년 1월부터 1901년 5월 14일까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김윤식의 뒷바라지를 자진하여 맡아 신의로 돌본다.

서울로 돌아온 나철은 동양평화를 추진하고자 민간외교활동을 전개했다. 43세에 1905년 6월 동지 이 기(李沂)·오기호(吳基鎬) 등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 정계요인을 방문하면서 "동양평화를 위해 한(韓)·청(淸)·일(日)이 동맹할 것과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선린의 교의로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네 번을 건너가 글을 써서 일본 정부와 국회에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주장하였다. 나철 선생이 일왕에게 보낸 글이 박은식 선생의 《한국통사》에 “한국 선비가 일본 황제에게 상소함(韓士上日皇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45세인 1907년에는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濟純)과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정권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폭발장치를 한 상자를 보내 이들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다시 오적(五賊)을 제거하기로 모의하고 동지규합과 자금모집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과 같이 권총을 구입하여 수차에 걸쳐 이들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재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서창보(徐彰輔)가 피체되어 사건 전모가 폭로되자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였다. 6월에 10년간의 유형(流刑)을 선고받아 그해 7월 12일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지도(智島)에 유배되었으나 10월에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그 후 나철은 평소에 믿고 있던 단군성도(檀君聖道)를 숭상하여 1908년 12월 단군성도의 영계를 받았다. 나철은 민족갱생의 도(道)는 국조단군(國祖檀君)의 교(敎)를 부활함에 있음을 깨닫고 1910년 7월에 단군교(檀君敎)를 대종교(大倧敎)로 창교(創敎)하여 제1세 교주에 추대되어 김 헌(金獻)·윤세복(尹世復)·이원식(李元植) 등과 같이 활약하였다.

그 전에 1905년 12월 30일 오후 11시경 서울 서대문역에서 백두산지역에서 수도하고 있는 두암(頭巖) 백전(伯佺)을 만나다. 두암은 그의 스승 백봉(白峯)의 명을 받아 나철을 찾아와 대황조사상과 배달민족의 이상형이 담긴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주었다. 1908년 12월 5일(음력 11월 12일) 두일백이 나철의 숙소(동경 청광관)를 찾아왔다. 그는 나철에게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 한 권을 주었다. 그리고 단군포명서에 관한 일이 나철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나철은 백두산 수도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민족총화의 구심점이 대황조와 대황조의 밝고 밝은 사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대황조사상인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이념을 부활시켜 보급함으로써 역사의 왜곡에 가려진 민족혼을 밝히고 그 불씨를 되살리려고 전력투구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북만주 10여 개소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을 펴는 한편 항일 구국운동에 헌신하다 귀국하였다. 나철은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가 비록 망했으나 도(정신, 국혼)는 가히 존재한다)는 신념으로 대종교 중광에 혼신을 다한다. 나철은 한민족의 민족의식 각성을 촉구했고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을 대종교인으로 만들어갔다. 대종교인이 중심이 되어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1911년 중광단을 효시로 출범한 정의단, 북로군정서, 신민부, 서로군정서 등을 들 수 있다.

1911년 7월 나철은 영적(靈蹟), 고적(古跡)을 찾기 위해 강화도의 제천단, 평양의 숭령천을 거쳐 백두산을 지나 화룡현 청호(靑湖)이 새로 교당을 세웠다. 914년(음력) 5월 13일 나철은 30만 명 이상의 신도를 총괄하는 대종교 총본사를 백두산 가까이 있는 북간도 화룡현 청호(靑湖, 평강상리사 삼도구)로 옮겨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0월 3일 총본사에서 개천절 행사를 치렀다. 아울러 서간도 일대에 시교당을 설립하고 박달학원, 동창학교, 백산학교, 대종학원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대종교 교세가 번창할수록 일제의 감시도 더욱 심해졌다. 1915년 정월 나철은 서울로 돌아왔으나 국내 사정은 더욱 어렵게 돌아갔다. 그해 10월 1일 일제는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 종교통제안 공포’에 의거 ‘포교규칙’에서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제는 대종교가 공인종교가 아니고 민족종교로서 항일독립결사체로 보아 대종교 포교를 불법화하였다. 나철은 그해 12월 21일 이의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지만, 일제는 대종교가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했다.

1916년 4월 13일 나철은 교통을 이을 천궁영선식(天宮靈選式)을 하였는데 이날 무원(茂園) 김헌 종사가 당선되었다.

8월 4일 나철은 구월산 삼성사를 봉심(奉審)할 목적으로 서울 출발하였다.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는 단군이 어천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삼성사는 한인, 한웅, 단군의 모시는 곳이다. 나철은 삼성사를 수리하여 경배식을 하고 단군왕검 천진(天眞)을 봉안하였다. 8월 15일 나철은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일왕(日王)과 일의회(日議會)에 견책의 장서(長書)를 보낸 다음 국가와 교(敎)를 위하여 53세의 나이로 자결 순사(殉死)하였다.

나철의 대종교 중광과 포교활동은 그 자체로서 독립운동의 인적·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는 한일병탄이후 종교단체, 언론기관, 학술단체, 독립단체를 중심으로 대종교민족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이로써 나철은 한국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독립운동의 아버지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전남 보성군은 지난 2006년부터 나철이 태어난 금곡마을에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선양사업을 추진하여 생가 복원 등의 사업을 완료한데 이어, 사당과 기념관 건립 등의 선양사업을 적극 추진해 왔다.

보성군은 2016년 홍암 나철선생의 순명 100주기를 맞아 홍암나철기념관을 개관했으며, 한국 독립 운동사를 재조명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앞으로 선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하여 보성을 의향의 성지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