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도난당했던 전(傳)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崇禮門) 목판」 2점,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 등 도난 문화재 총 123점을 회수했다.

'숭례문 목판'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崇禮門) 목판」은 2008년 9월 전남 담양 몽한각(潭陽 夢漢閣) 내에서 도난당한 것으로 야산 비닐하우스에 장기간 은닉된 상태였다. [사진=문화재청]
'숭례문 목판'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崇禮門) 목판」은 2008년 9월 전남 담양 몽한각(潭陽 夢漢閣) 내에서 도난당한 것으로 야산 비닐하우스에 장기간 은닉된 상태였다. [사진=문화재청]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은 서울지방경찰청(총경 곽정기) 지능범죄수사대와 공조 끝에 ‘만국전도(萬國全圖, 보물 제1008호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 중 주요 유물)’ 1점과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류 필사본(筆寫本) 116책, 전(傳)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崇禮門) 목판」 2점, 「후적벽부(後赤壁賦) 목판」 4점 등 도난문화재 총 123점을 회수하였다.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崇禮門) 목판」은 2008년 9월 전남 담양 몽한각(潭陽 夢漢閣) 내에서 도난당한 것으로 야산 비닐하우스에 장기간 은닉된 상태였다. 이에 단속반이 첩보를 입수, 11년 만에 회수했다. 문화재 사범들은 공소시효가 완료되기를 기다렸다가 경매업자를 통해 처분·유통하려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담양 몽한각(潭陽 夢漢閣)은 1803년(순조 3년) 담양부사 이동야(李東野)와 창평현령 이훈휘(李薰徽) 등이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의 5대 후손인 이서(李緖, 1482∼?)를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재실(齋室)로서 1974년 12월 전남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숭례문(崇禮門) 목판」은 1827년 경 양녕대군 후손들이 중각(重刻)하여 전남 담양의 몽한각(夢漢閣)에서 보존했던 것이다.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의 편액 대자(大字)인 ‘숭례문(崇禮門)’을 판각한 현존하는 유일의 목판본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숭례문 편액의 대자(大字)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1394~1462)의 친필로 알려져 왔지만, 작자를 밝히는 낙관이 현판에 없기 때문에 현재는 다수설로 거론되고 있다. 숭례문 현판의 복원을 위한 고증 자료를 수집하는 과장에서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1호)에서 숭례문 현판의 탁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보(李承輔, 1814~1881)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복원을 위한 영건도감(營建都監)의 제조(提調)로 있으면서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이승보의 문집인 『석산유고(石山遺稿)』의 내용이 뒷받침 하며,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도 이승보가 숭례문 현판의 개색 건으로 현판을 직접 확인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지덕사 소장 탁본과 이승보의 연관성은 매우 높다고 보고 있다.

현존 최고의 자료로 추정되는 이 탁본의 제작 시기는 이승보의 영건도감 제조재직 시기 및 이유원이 편찬한 『임하필기』가 1871년 집필되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1865년~1870년 무렵으로 판단하고 있다. 고종 연간 (1863~1907)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는 현판을 쓴 인물을 양녕대군이라고 밝혔다.

만국전도(萬國全圖), 보물 제1008호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 중 주요 유물로1993년 9월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도난당한 것을 이번에 회수했다. [사진=문화재청]
만국전도(萬國全圖), 보물 제1008호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 중 주요 유물로1993년 9월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도난당한 것을 이번에 회수했다. [사진=문화재청]

 

“우리 태조 5년(1396)에 돌로 쌓았는데 평양 감사 조준(趙浚)이 공사를 감독하였다. 세종 4년(1422)에 고쳤는데, 주위가 1만 4천 9백 35보로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8만 9천 6백 10자요, 높이가 40자 2치이다. 문 8개를 세웠다. 정남쪽문을 숭례문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

만국전도와 전적류 116책은 1993년 9월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도난당한 것으로 문화재 사범(事犯)들은 이를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과 자택에 은닉‧보관하고 있었다가 이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에 의해 검거, 25년 만에 회수되었다. 조사 결과, 이들은 만국전도가 도난당한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실을 알면서도 취득하였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경매업자를 통해 처분·유통하려 하였다.

이번에 회수된 ‘만국전도’는 크기가 가로 133㎝, 세로 71.5㎝로, 1989년 8월에 보물 제1008호로 지정된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의 유물 중 1점이다. 만국전도는 ‘곤여만국전도’(보물 제849호), ‘하백원의 만국전도와 동국지도’(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85호)와 함께 현존하는 3점의 필사본 세계지도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문화재는 조선 중기의 문신 여필 박정설(汝弼 朴廷薛, 1612~?)이 1661년(현종 2년)에 채색, 필사한 세계지도다. 이 지도는 선교사 알레니(Aleni, 1582~1649)가 1623년 편찬한 한문판 휴대용 세계지리서 직방외기(職方外紀)에 실린 만국전도를 민간에서 확대, 필사한 세계지도로 현재까지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동산문화재지정보고서: ‘89 지정편』(1990)에 실린 지정 당시 「만국전도」 사진과 회수된 「만국전도」 원본을 비교하면, 지도의 윤곽과 도법 등이 일치하고 지명을 수정한 부분 및 채색 필사된 붓질의 방향도 같다. 네 모서리에 쓴 ‘萬國全圖’의 자획도 동일한 필체로 확인된다.

또한, 함양박씨 문중의 전적류는 18세기 퇴계학맥을 계승한 유학자로 평가되고 있는 소산 이광정(小山 李光靖)의 소산선생문집(小山先生文集)을 비롯하여 나암 박주대(羅巖 朴周大)와 그의 현손인 박정로 등이 직접 쓴 친필본 등으로 구성된다. 해당 전적류 각각은 문학, 역사, 의학, 법률 등 다양한 주제를 담아문중의 학문적 바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후적벽부(後赤壁賦)」 목판 또한, 19세기 중반 양녕대군의 유묵으로서 인식되고 판각되었던 자료라는 점에서 당시의 역사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