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숭모회는 조국독립을 위해 일신을 바치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순국 113주기 추모식을 3월 26일(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추모식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김황식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유족, 숭모회원 등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약전 봉독, ‘최후의 유언’낭독, 추모식사 및 추모사, 안중근 동양평화상 시상, 추모 공연, 헌화 순으로 50분간 진행된다.

안중근 의사의 모습(여순감옥)   사진 독립기념관
안중근 의사의 모습(여순감옥) 사진 독립기념관

숭모회는 이 자리에서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에게 제3회 안중근 동양평화상을 수여한다. 신용하 명예교수는 한국민족의 기원에서부터 독립협회,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한국 근대사, 독도 등 역사에 대한 관심과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역사를 재조명하였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교육운동에서부터 하얼빈 의거에 이르는 국권회복운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그 밑바탕에 평화사상이 자리해 있음을 체계적으로 논증하였다.

‘안중근 동양평화상’은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평화사상을 기리고 미래세대로 계승하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안중근 의사 관련한 학문연구 및 선양 활동 등에 공헌한 이를 매년 선발하여 상패와 상금 2천만 원을 수여한다.

1879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강구하다가 돌아와 사재(私財)를 털어 삼흥학교(三興學校)ㆍ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안 의사는 고종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나라가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외국으로 나가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안 의사는 러시아령의 블라디보스톡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과 구국의 방도를 모색하였고, 1909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 동맹’을 결성하며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하였다.

1909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10월 26일 9시경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쏘아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군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하늘을 향해 “코레아 우라(대한독립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비판하며 시정을 요구하였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 평화의 정착을 주장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3월 26일 순국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옥중에서, 1910년 3월 9, 10일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