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3세 임태숙 씨는 1남 4녀를 두었고 손자가 8명이다. 다복한 그는 복지관과 경로당 등에서 어르신들의 건강을 돌보는 강사로 활동하고 현재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스포츠건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임태숙 씨는
임태숙 씨는 "브레인명상은 중년에 제가 주인공인 삶을 찾아주었고, 이제는 제 인생의 황금기를 만들어 주었죠."라고 했다. [사진=김경아 기자]

외손자 영우는 “나는 세상에서 외할머니를 가장 존경한다. 70살이 넘으셨는데 젊고 씩씩하고 옷도 예쁘게 입고 대학교도 다니신다. 지금도 강사로 활동해서 용돈도 주신다.”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한다. 지난해 영우는 외할머니 임태숙 씨와 함께 맨발걷기, 푸시 업, 매달리기를 하고 식단을 조절하면서 90kg에서 72kg으로 체중도 감량했다. 외할머니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기 때문에 얻은 결과였다.

이렇듯 존경받는 70대 젊은이 임태숙 씨의 비결은 무엇일까? 지난 8일 포항에서 만난 그는 “브레인명상 덕분에 내가 주인공인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 최근에 더욱 달라진 내 모습이 엄청 자랑스럽습니다.”라고 시원하게 웃었다.

그가 브레인명상을 처음 시작한 것은 40대부터였다. 부산에서 건설회사 사장이던 남편은 조카가 운영하던 농장을 사정상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누님의 권유를 받고는 울산 외곽에서 농장을 시작했다. 어려움이라곤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이던 남편은 어릴 적부터 대농장주가 꿈이라며 의논 한마디 없이 산골짜기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돼지, 청둥오리, 거위, 닭, 토끼 등을 키우고 양어장을 운영했다. 태양열 시스템을 도입한 양어장은 돈이 무한정 들어갔다. 그러다 신문에 민물고기 디스토마 기사가 나면서 폭삭 망하기도 했다. 농사나 축산이라고는 아무 경험도 없는 임태숙 씨는 사료를 나르고 수의사 왕진비를 아끼기 위해 직접 돼지 새끼를 받으며 농장일을 했다. 

“남들은 전원생활이라고도 하지만 직접 살아보면 전혀 다르죠. 제일 큰 걱정은 자식들 교육이었어요. 결국 부산에서 울산으로 전학을 시켰지만 산중턱 외딴 곳이어서 차가 다니지 않아 4km를 걸어서 마을까지 나가야 했어요. 학원은 꿈도 못 꾸었죠. 다행히 서로 챙기고 가르쳐주며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도 받고 대학을 갔어요. 하지만 엄마로서 해 준 게 없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딸만 낳는다고 구박을 받아서 아들 못지않게 공부시킬 거라고 했었죠.”

임태숙 씨는 지난해 큰 딸과 함께 명상여행을 다녀왔다. [사진=본인 제공]
임태숙 씨는 지난해 큰 딸과 함께 명상여행을 다녀왔다. [사진=본인 제공]

임태숙 씨는 어릴 적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5남 3녀 중 다섯째 딸이었는데 오빠들은 트럼펫, 드럼을 자주 연주했고 남동생들과 그는 활달한 성격이었다. 무의촌 진료의를 꿈꾸기도 했지만 현모양처가 되고자 현실의 어려움을 참고 참았다. 중풍으로 쓰러져 팔, 다리를 쓰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결혼 직후부터 돌보았다. 그러다 나이가 40대에 들어서며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고통의 터널 안에 갇힌 듯 했다.

마침 누나를 찾아온 남동생이 “어디서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아이들은 책임져야 한다.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임태숙 씨는 “제가 정말 어떻게 될까봐 남동생이 걱정되었나 봅니다. 제게 단월드(당시 단학선원)에 회원 등록을 해주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빠지지 않고 단월드를 열심히 다니며 건강을 찾았고 심성교육을 갔다. “저는 늘 착해야 되고 참아야 하고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려야 한다고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심성교육 때 ‘의식해부도’를 보니 제 깊은 곳에 ‘자아’라는 게 있었어요. 순수하고 밝은 자아가 내게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세상이 달라 보이더군요. 숨통이 트였죠.”

단월드 센터에 가면 살림을 도맡을 정도로 열심히 활동했다. 단학강사(현 국학기공 강사)로 성장해 학생과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며 25년이 넘도록 활동했다. “누가 원장님의 어머니냐고 할 정도였어요. 당시 KBS 공개홀 무대에서 회원들과 ‘단무 12초식’을 시범 보였는데 기자가 감동해서 회원이 되었죠. 또 행사후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독일 치과의사들 모임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독일에서 감사 편지를 받기도 했어요.”

그는 남편과 딸, 사위, 아들, 며느리도 브레인명상을 하도록 했다. “아들이 심성교육을 갔다 와서 감사하다고 큰 절을 하더군요. 큰 딸이 결혼할 때는 예비사위에게 ‘단월드 평생 회원이 아니면 시집 못 보낸다.’고 했더니 당장 입회하고 오더군요. 큰딸이 이젠 저를 이끌어줄 정도로 성장했죠.”

브레인명상 중 단무수련을 하는 임태숙 씨. [사진=본인 제공]
브레인명상 중 단무수련을 하는 임태숙 씨. [사진=본인 제공]

힘든 순간도 찾아왔다. 59세 때 남편을 여의었고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남편이 마지막 순간 ‘미안했다’하더군요. 제가 방황할 때 셋째 딸이 권해서 울산대학과 춘해대학, 울산발전연구원이 공동주최하는 교육을 받았죠. 남편 생각에 신발 끈을 묶는 척 눈물을 닦았지만 어릴 적 좋아하던 무용과 체조를 하면서 조금씩 슬픔을 잊었습니다.”

그는 더 큰 성장을 위해 마스터힐러 교육을 신청했고 첫 교육으로 PBM(파워브레인메소드)교육을 잘 마쳤다. 그런데 센터에서 함께 활동하며 제2의 가족처럼 생각하던 사람과 크게 부딪혔다. 오해가 오해를 낳았고 믿고 신뢰한 만큼 섭섭함이 컸다. 그는 그 사람과 마주칠까봐 마스터 힐러 교육과정을 포기했다.

그렇게 7년이 지난 2018년, 큰 딸과 대이센터 황서연 원장은 그에게 “교육과정을 마치셔야죠.”라고 조용히 권했다. 딸은 “엄마 인생이다. 누구를 원망하면서 인생을 허비할 거냐? 엄마한테만 집중해라.”라고 따끔하게 이야기했고 원장은 정성스럽게 대하며 꾸준히 기다려 주었다. 펄쩍 뛰며 거절했던 그는 끈질긴 설득에 마스터힐러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밟았다.

임태숙 씨는 “두 번째 통찰과정을 밟으며 내가 눈과 마음을 닫고 웅크리고 살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나와 남은 서로 달랐을 뿐이지 틀린 게 아니었구나.’라는 걸 알았죠. 그걸 알게 되니 성낼 필요도, 제 자신을 들볶을 필요도 없었어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우선 제 자신이 의젓해졌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어요.

크게 숨을 쉬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볍고 여유롭고 차분해지더군요. 그때서야 눈이 떠졌죠. 남에게 좌지우지 되지 말고 제 소중한 삶을 되찾아야겠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임태숙 씨는 마스터힐러 교육을 마친 이후 NGO활동과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위) 지난해 지구시민운동 활동 (아래) 지난해 셀프힐링법 'BHP 명상'을 전하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임태숙 씨는 마스터힐러 교육을 마친 이후 NGO활동과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위) 지난해 지구시민운동 활동 (아래) 지난해 셀프힐링법 'BHP 명상'을 전하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그는 검정고시를 본 후 70세에 글로벌사이버대학교에 입학했다. 큰 딸은 “주변에서는 엄마가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줄 몰랐어요. 현명하셨거든요.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기에 엄마가 늦게 또 고생을 하실 것 같아 가족들이 대부분 말렸죠. 그래도 꿋꿋히 의지를 갖고 도전하셔서 지역에서 최고령 합격자가 되셨어요. 그 이후 대학에 진학한다고 할 때는 가족 모두가 축하했죠. 엄마가 하는 강사 활동과 연계해 좀 더 전문적인 대학교육을 받고 싶어하셨어요.”라고 했다.

임태숙 씨는 대학입학 첫날 충남 천안에 있는 본교를 찾아갔다. 기차역과 대학교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만큼 기뻤다. “대학에서 배우는 수업 하나 하나가 다 저를 위한 것이었어요. 제 의식을 깨워주고 그냥 뇌를 쓰는 뇌사용과 자신의 뇌를 이해하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뇌 활용이 어떤 차이인지 명확하게 알려주었어요. 좋은 정보와 함께 건강과 운동 효과도 배우니 다른 사람에게 더 잘 전달 할 수 있겠더군요.”

그는 새롭게 국학기공 강사 교육도 받을 예정이다. “국제심판과정까지 단계별로 전문화 되었더군요. 제가 배운 것들을 융합해서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노老老케어’의 선두주자가 되고자 합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임태숙 씨는
임태숙 씨는 "글로벌사이버대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그동안의 경험, 그리고 새롭게 국학기공 강사 교육을 받고서 그 모든 걸 융합해 '노노케어'의 선두주자가 될 겁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사진=김경아 기자]

그는 “이 나이에 아프고 자식이 보내주는 돈에 의존한다면 결국 요양원에 갈 수밖에 없겠죠. 요양원에서도 매달 큰 비용이 듭니다. 그러다보면 긴병에 효자 없다는 걸 체험가게 될 겁니다.”라며 “제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을 테지만 건강해서 사람들에게 스스로 건강을 돌볼 수 있게 하고, 가슴에 희망을 일깨우며 뇌를 활용하는 삶을 살도록 돕고자 합니다.”라고 그의 신념을 밝혔다.

임태숙 씨는 자신의 인생 책으로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이승헌 총장의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를 꼽았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14페이지입니다. ‘인생의 후반기는 결코 쇠퇴와 퇴보의 시기가 아니며, 놀랍도록 희망차고 충만한 황금기가 될 수 있다. 그 비밀은 당신이 노년의 삶에서 어떤 목표를 갖는가에 달려있다. 인생 전체에서 노년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고, 노년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전환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노년은 정말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여정이 될 수 있다.’ 이 글이 앞으로 제 삶의 모토입니다. 제 황금기는 지금부터입니다.”라고 힘 있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