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출신 독립운동가 김두봉, 우리말글 연구에도 힘써 '언어 남북 분단' 막았다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 김두봉, 우리말글 연구에도 힘써 '언어 남북 분단' 막았다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0-07-18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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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과 부산국학원, 18일 제13회 한국 선도의 역사 문화 학술대회서 독립운동가 김두봉 조명

(사)국학원(원장 권나은)과 부산국학원(원장 박선후)은 공동주관으로 7월 18일 부산 랜드멘토부동산아카데미에서 제13회 한국 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를 열고 '부산이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 백연 김두봉의 삶과 사상'이라는 주제로 독립운동가 김두봉을 조명하고 알렸다. 이 날 행사는 코로나19확산을 막기 위해 50명 이하로 참석을 제한하고, 유튜브로 실시간 생중계하였다. 

박선후 부산국학원장은 개회사에서 "부산이 낳은 위대한 백연 김두봉 선생은 부산 기장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 학자이며 정치인으로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다"며 하지만 "백연 김두봉은 부산 출신으로 누구 못지않게 독립운동을 다방면으로 펼쳤으나, 이를 아는 부산 시민은 많지 않다."라고 말하고 "이번 학술대회는 백연 김두봉 선생의 삶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이며 위대한 애국애족 정신을 널리 기릴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학술대회의 의의를 밝혔다.

(사)국학원과 부산국학원은 공동주관으로 7월 18일 부산 랜드멘토부동산아카데미에서 제13회 한국 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를 열고 '부산이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 백연 김두봉의 삶과 사상'이라는 주제로 독립운동가 김두봉을 조명했다. [사진=부산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사)국학원과 부산국학원은 공동주관으로 7월 18일 부산 랜드멘토부동산아카데미에서 제13회 한국 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를 열고 '부산이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 백연 김두봉의 삶과 사상'이라는 주제로 독립운동가 김두봉을 조명했다. [사진=부산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권나은 국학원장 또한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이지만, 정작 부산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백연 김두봉 선생의 위대한 행적이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서 널리 알려짐을 물론, 부산국학원의 이런 뜻있는 학술활동이 제대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강상익 부산뇌교육협회 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학술대회에서 제1발표자 김병기 사단법인 광복회 학술연구원 원장은 '백연 김두봉 선생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국내 활동기, 임시정부시기, 연안시기로 나누어 선생의 독립운동을 고찰했다.

김병기 원장은 “김두봉의 행적을 추적하다보면 해외 독립운동은 임시정부만 알았던 우리에게 이에 준하는 조선독립동맹이라는 또 하나의 독립운동단체가 있었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김두봉의 독립운동 활동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국내 활동기, 임시정부 시기, 연안시기가 그것이다.”고 말했다.

김병기 원장에 따르면 백연(白淵) 김두봉(金枓奉, 1889-1961)은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 87번지에서 김돈홍(金敦洪)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일제 침략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김두봉은 17살이 될 때까지 향리에서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우면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보통학교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에 1908년 단신 서울로 올라왔다. 그해 6월 소격동에 설립된 기호학교(畿湖學校) 특별과에 입학했다. 특별과는 1909년 12월 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이듬해 1월 폐지되어 중등교육과정의 본과만 남게 되었으므로 김두봉은 기호학교 특별과의 1회생이자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

1회 졸업생으로 기호학교를 졸업한 김두봉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배제학당에 입학했다. 낮에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밤에는 주시경이 운영하는 하기강습소에 다녔다. 김두봉은 1914년까지 하기강습소 야간반에 다니며 한글, 국어 문법 등을 배웠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강제로 ‘한일병합조약’을 선포하고 식민통치가 강화되자, 이 시기를 전후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은 지하로 숨어 비밀단체를 조직하였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김두봉도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두봉은 중국 망명 직후 상해에서 신채호가 주필로 있는 <신대한>』 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한다.

김병기 사단법인 광복회 학술연구원 원장은 '백연 김두봉 선생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국내 활동기, 임시정부시기, 연안시기로 나누어 선생의 독립운동을 고찰했다. [사진부산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김병기 사단법인 광복회 학술연구원 원장은 '백연 김두봉 선생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국내 활동기, 임시정부시기, 연안시기로 나누어 선생의 독립운동을 고찰했다. [사진부산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김두봉은 최남선이 주재하던 광문회(光文會)에 들어가서 한글을 연구하며, 회보와 잡지 <붉은 저고리>, <靑春> 등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김두봉은 여기에서 잡지 편집과 사전편찬에 참여하였다.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이 못다 한 일을 이어받아 <조선말본>을 저술하였다.

김병기 원장은 “국내활동기 김두봉이 처음 만나는 인물은 주시경이었다. 그 스승을 만남으로써 김두봉은 평생 동안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열정을 바쳤다. 그 부분은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을 떠나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대동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를 통해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투쟁하였으며, 조선광문회를 통해 이미 촉망받는 유망한 젊은 학자로 우뚝 섰던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민족종교인 대종교도로서의 위상도 높아 그가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선 것도 대종교의 총체적 항일운동의 맥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두봉은 학생들과 함께 직접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적극 나섰다. 일제의 집요한 추적이 뒤따르자 그는 지하에 은신하였다가 마침내 망명을 결심하였다. 그 해 4월 초순 이제 결혼 2년째를 맞는 단란한 신혼생활을 뒤로한 채 부인을 남겨두고 상해로 탈출했다.

김병기 원장은 “상해시기 김두봉의 활동은 더욱 다양해진다. 경상도 대표로서 임시의정원 의원을 시작으로 안창호·이광수 등과 같이 임시사료편찬회 위원으로서의 활동, <신대한> 신문을 통해서는 신채호 주필과 호흡을 맞추어 편집장으로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어 ‘대한교육회’에서의 활동은 그가 평생 교육자로서의 소명을 잘 드러내는 역할이었고, 한인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한 인성학교에서는 교사로 뿐만 아니라 교장으로서 운영을 책임지기도 했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열정은 <조선말본>의 증보판인 <깁더 조선말본>의 발간으로 빛을 보았고, 정당정치를 위한 시험대로서 한국독립당의 발기인과 이사로서, 또한 당의· 당강을 작성하기 위한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김병기 원장은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8년여 동안의 이동시기를 겪게 되는데, 이른바 ‘물 위에 떠다니는 정부’라는 말처럼 이동시기는 임시정부 관련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 모두에게도 고난의 시기였다. 이 시기를 김두봉은 온통 정치활동에 쏟아 부었다. ‘통일동맹’을 결성하였고, 그 결실로 민족혁명당을 창립하면서 중앙집행위원, 조직부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틈틈이 김원봉을 교장으로 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에서 교관으로서 한글과 한국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고 말했다.

1940년 중경에 도착한 것도 잠시 김두봉은 아들 상엽을 김원봉에게 맡기고 1942년 봄 연안행을 택한다. 자의로 택했다는 설도 있고, 임시정부의 푸대접에 반발하여 자포자기 심정으로 택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연안에서의 화북조선독립동맹에서 김두봉은 주석으로서 화려하게 등장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김병기 원장은 “비록 정치적인 이념과 노선을 달리 했다 해도 일제와 대항하여 말살되어 가는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가 기울였던 노력은 당시 어느 누구에 못지않았음에도 우리의 망각 속에 잊혀진 인물로 남아있음이 안타깝다.”며 “이런 의미에서 우리말과 글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그의 업적과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바친 그의 열정은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을 떠나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고 발표를 마무리했다.

이어 '백연 김두봉 선생의 문화활동(우리말과 한글 연구)을 발표한 박용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제외할 수 없는 일문이 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두 항일투자로 밀양에 김원봉이 있다면, 한국 민주주주의 성지(부마항쟁) 부산에는 김두봉이 있다. 그러나 현재 두 분은 모두 남북에서 잊힌 항일투사로 독립유공 서운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 연구위원은 이어 "김두봉은 빼어놓을 수 없는 업적이 또 하나 있다. 왜적 치하에서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 조선민족을 영구히 유지한 일을 하였다. 주시경의 수석 제자로 우리말 문법책 <조선말본>(1916)을 저술, <깁더 조선말본>(1922)을 출간하여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내었다. 조선의용대의 한글표기도 김두봉의 영향하에서 일루어졌다. 1948년에 제정된 '조선어 신철자법'은 김두봉의 이론을 구체화한 것이다."며 "국토와 국가와 민족은 70여 년 분단되었으나, 우리말과 한글은 분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주시경의 차석 제자 최헌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주시경의 수석 제자 김두봉, 그리고 이극로가 있어 주시경의 문법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말과 한글은 분단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박용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백연 김두봉 선생의 문화활동(우리말과 한글 연구)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부산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박용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백연 김두봉 선생의 문화활동(우리말과 한글 연구)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부산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박 연구위원은 "언어는 민족의 혼을 담는 그릇이다. 일제강점기 주시경, 김두봉, 이극로, 최현배를 포함하여 국어학자들이 목숨을 바쳐 우리 말글을 연구하고 지켜냈기에 언어의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의 말과 글인 조선어와 한글이 침략자에게 국어와 국문의 지위를 빼앗긴 시기였다. 그 결과 대한제국기의 국어였던 조선어는 이 시기에 방언 또는 지방어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며 일본어를 국어로 위치지워 보급하였다. 그들은 일본어 보급을 통해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고자 하였다."고 말했다.

김두봉은 주시경의 학설을 계승하고 자신의 주장을 넣어 <조선말본>(1916)을 신문관에서 출간하였다. 그는 한글전용으로 이 책을 서술하였는데, 다만 한글로 이해가 곤란한 내용에 대해 한문을 병기하였다.

박 연구원위원은 "상해시절 독립운동에 몰두하면서도 우리말 연구를 계속한 김두봉은 망명한지 3년만에 우리말과 한글의 문법책을 개정하여 <깁더 조선말본>(1922)으로 출간하였다. 이 문법책은 해방 뒤 북한 정권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라며, "그는 '어느 겨레(민족) 어느 나라의 말에든지 반드시 제각금 서로 트어 쓰는 한 본이 있'다라고 하여 통일된 문법책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 책에서도 그는 한글전용을 강조하였다"고 밝혔다.

김두봉은 중국시절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도 민족어 연구를 지속하였다. 박 연구위원은 "김두봉은 1923년에서 1929년에 걸쳐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30여만의 조선말의 어휘를 수집하고 해설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는 자신이 수집하고 해설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말사전을 출판하고자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이루지 못하였다."고 설명했다. 김두봉은 1929년 10월 31일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서울에서 조직되었을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박 연구위원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한 김두봉의 활동을 소개했다. 북한의 경우에도 해방 초기에는 1933년에 조선어학회가 완성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김두봉의 귀국 뒤, 국어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그는 1946년 9월에 김일성대 총장이 되었다. 이 대학의 역사문학부 속에 조선어문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이 강좌가 조선어를 연구하는 대표적 기관이 되었다.

박 연구위원은 " 조선어문학 강좌는 그의 엄격한 지도 밑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물의 하나가 1948년에 제정된 '조선어 신철자법'이었다. 이 신철자법은 김두봉이 <깊더 조선말본>에서 주장한 이론을 구체화시킨 것으로 조선어철자를 표음주의 표기법을 배격하고 형태주의적 원칙에서 제정하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박 연구위원은 김두봉의 언어 독립투쟁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결론으로 제시했다.

김동환 (사)국학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이  '백연 김두봉 선생의 사상'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부산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김동환 (사)국학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이 '백연 김두봉 선생의 사상'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부산국학원 유튜브 갈무리]

 

 

박 연구위원은 "우리말과 한글 연구를 통해, 조선 민족을 영구히 유지시켰다. 남과 북의 우리 민족은 민족 구성의 여러 요소가 같으니, 한강물과 대동강물이 전부 마르더라도 우리 민족은 영원 불멸할 것이다."며 "민족 구성의 핵심요소로서 언어는 중요하다. 언어학은 역사학과 더불어 국학 분야의 핵심 학문이다. 일제에 맞서 언어 독립투쟁을 전개한 주시경, 김두봉, 최현배 등 국학자들의 우리말글 사랑과 민족사랑, 나라사랑의 가르침을 잘 살려, 현재의 남북 동포들은 더욱 활발하게 교류하고 우리말의 연구를 심화하여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제3발표자인 김동환 (사)국학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백연 김두봉 선생의 사상'을 주제로 발표했다. 김동환 책임연구위원은 "김두봉의 사상은 크게 두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대종교적 민족주의이고 하나는 이상적(理想的) 사회주의일 듯하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 사회주의는 그 실체가 모호하다. 그러나 김두봉의 종교관이나 사상관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글은 거의 없다. 이 역시 대종교단 내의 특수한 사정(사회주의 관련 내용 혹은 인물들에 대한 避記 현상)과 무관치 않다."고 밝혔다. 

이어 김 책임연구원은 김두봉의 단군 인식에 관해  "김두봉에 단군의 경험은 남다르게 와 닿았다. 그가 대종교에 입교한 이후로, 그의 한글투쟁이나 사회주의적 투쟁의 배경엔 늘 단군이 있었다. 일각에서 그를 단군광신자로 몰아세우거나 국수주의자로 공박하는 것도 그 때문일 듯하다."고 말하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대종교에 심취하여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려고 꾸준히 노력했던 인물임을 확인해 볼 때, 대종교를 떠난 그의 국어사랑과 나라사랑, 나아가 항일투쟁의 삶을 헤아리기 힘들 것이다."고 덧붙였다. 

김 책임연구원은 "대종교와 관련하여 남아있는 김두봉의 사상적 견해는 <독립신문>에 실린 「개천절력」이 유일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짧은 글임에도 개천절에 대한 그의 개략적 이해는 대종교의 교사와 관련한 김두봉의 상식적 수준을 넘어 해박한 식견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면서 "그는 대종교의 등장을 창교가 아닌 부흥으로 이해하고 있고, 단군을 대종교의 창교주로 인식했다는 점, 그리고 역대 단군신앙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꿰뚫어 개천절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대종교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헤아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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